<설계자의 전쟁론> 1부 3장 | 제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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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기브라임 백작령과 라드 요새를 잇는 가도.
그곳에서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면, 인적이 끊긴 험지에 옛 성화교의 폐수도원이 숨어 있었다.
한때는 신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지금은 무너진 담벼락 사이로 황량한 바람만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지형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좁은 분지 깊숙한 곳.
마치 대지가 집어삼킬 듯 입을 벌린 협곡 끝자락에 수도원이 박혀 있었다.
들어오는 길이라곤 비좁은 외길 하나뿐.
깎아지른 절벽이 삼면을 감싸고 있어, 수도원이라기보다는 천연의 요새에 가까웠다.
적막했던 수도원 지하.
그 어둠 속에서 낯선 인기척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수도사들의 경건한 기도가 아닌, 쇳내와 땀 냄새가 뒤섞인 흉흉한 살기였다.
"저쪽도 확인해. 빈틈 보이지 말고."
복도를 오가는 이들은 엉성한 갬비슨이나 낡은 철 투구를 걸치고 있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조잡한 무장이었으나, 그들이 움직이는 대형이나 경계 태세는 결코 오합지졸 산적 떼의 그것이 아니었다.
명백한 위계와 질서.
누군가에 의해 훈련된 병력이었다.
그리고 그 거친 무리 한가운데.
가장 깊숙한 독방에 이질적인 존재들이 갇혀 있었다.
과거 수도승의 고행을 위해 쓰였을 좁은 감방.
육중한 철문 너머, 감시창에 매달린 두 사내의 눈이 번들거렸다.
"흐흐…”
그들의 시선에는 끈적하고 노골적인 욕망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고것 참 아까운 년들이 잡혀 왔네."
"허튼수작 부리지 마. 상품에 흠집이라도 냈다간 대장한테 목이 날아갈 테니까."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하수구의 오물처럼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멍청하긴. 저런 것들은 겁만 잔뜩 줘도 재미가 쏠쏠한 법이지."
비릿한 욕망이 섞인 대화가 오갔다.
하지만 그들은 문고리를 잡지는 못했다.
단순한 도적 떼였다면 진작 문을 박차고 들어왔을 것이다.
그들을 옭아매고 있는 규율은 생각보다 엄격했다.
보이지 않는 지휘관의 통제가 말초적인 욕망을 억누르고 있었다.
감시병들은 그저 감시창 너머의 포로들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길 기대할 뿐이었다.
허나, 철문 안쪽의 풍경은 그들의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뭔가 실마리가 있을 거야.’
어둠이 내려앉은 좁은 독방.
한쪽 구석에는 붉은 머리카락의 아이가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창가에 선 백금발의 소녀는 달랐다.
채광창 너머 들어온 달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나는 머리카락만큼이나, 그녀의 태도는 기이할 정도로 차분했다.
소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공포에 젖는 대신 차갑게 이성을 불태우고 있었다.
문의 두께,
경첩의 부식 정도,
들려오는 발소리의 주기,
그리고 놈들의 대화에서 흘러나오는 정보들.
그녀는 떨지 않았다.
자신의 생존에 도움이 될 아주 작은 단서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시선은 방 안 구석구석을 집요하게 더듬고 있었다.
'경첩이 낡았어. 습기 때문에 녹이 슬었군. 숟가락이라도 있다면 긁어낼 수 있겠는데.'
하지만 소녀의 시선은 곧바로 자신의 가느다란 손목으로 향했다.
불가능했다.
머리로는 계산이 서도,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이것이 그녀가 가진 치명적인 모순이었다.
그녀의 역량을 모두 펼치기에는 그녀의 육체는 너무나도 여리고 작았다.
'아버지는 지금쯤 움직이셨을까.'
상단의 정보력이라면 이미 실종 사실은 파악했을 터.
문제는 '비용'이었다.
수색대를 고용하고,
정보를 사고,
뇌물을 뿌리는 비용.
어림잡아 금화 백 솔린은 족히 깨졌을 것이다.
"비싼 여행이네, 정말."
소녀는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한숨 끝에는 포기가 아닌, 본전은 뽑고야 말겠다는 상인의 오기가 서려 있었다.
“후우.”
소녀는 짧은 숨을 내쉬며 벽에 등을 기대었다.
납치된 지 꼬박 사흘째.
대우는 예상보다 나쁘지 않았다.
놈들은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고, 거친 빵이나마 끼니도 제때 밀어 넣었다.
놈들은 그녀가 누구인지, 정확히는 그녀의 '몸값'이 얼마인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사내들만 우글거리는 소굴에서 사흘이나 무사할 리가 없었다.
자신의 안전은 확보되었다.
문제는 옆이었다.
소녀의 시선이 구석으로 향했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꼬마.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인상이었지만, 지금은 공포에 질려 껍데기만 남은 인형 같았다.
"……"
말을 걸어도 소용없었다.
몇 번이고 대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아이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알 수 없는 단어만 웅얼거릴 뿐이었다.
충격으로 정신을 놓은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부서진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
소녀는 잠시 탈출에 대한 계산을 멈추고 손을 뻗었다.
그녀의 하얀 손이 아이의 헝클어진 붉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차가운 이성 뒤편에 숨겨진, 작은 연민이었다.
"좀 먹지 그래."
소녀는 아이의 식판 위에 덩그러니 놓인 빵을 집어 들었다.
아침에 나온 빵은 손도 대지 않아 돌덩이처럼 굳어가고 있었다.
"받아. 뭐라도 씹어 삼켜야지."
소녀는 딱딱하게 굳은 빵을 억지로 아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굶어서 비실대면,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칠 힘도 없어. 살고 싶으면 억지로라도 삼켜."
매몰찬 듯하지만, 그 속에는 뼈 있는 조언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붉은 머리의 아이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허공만 응시할 뿐이었다.
극심한 공포가 아이의 영혼을 갉아먹어 말조차 앗아간 듯했다.
"… 하아."
소녀는 답답함과 안쓰러움이 뒤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아이의 마른 어깨를 끌어안았다.
품에 닿는 온기.
아이의 얕은 숨소리가 귓가에 위태롭게 내려앉았다.
잠시 후, 소녀는 아이를 품에서 떼어놓고 빵 조각을 잘게 뜯어 아이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자, 아."
오물, 오물. 아이는 마치 본능만 남은 작은 짐승처럼 기계적으로 빵을 씹어 넘겼다.
그 처연한 모습에 소녀의 울컥, 하고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손을 떼려 하자, 아이의 작은 손이 다급하게 그녀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마치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필사적인 힘이었다.
"……"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 떨리는 손끝이 전하는 의미는 명확했다.
'무서워요. 혼자 두지 마세요.'
소녀는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차마 그 손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대신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아이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 알았어. 도망 안 가."
그녀는 아이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꽉 잡고 있어. 놓치면 네 손해니까."
그 투박한 위로가 통했는지, 아이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소녀는 이를 한번 깨물고는 감시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이봐! 거기 밖에!"
쩌렁쩌렁한 외침.
감옥에 갇힌 포로의 목소리라기엔 지나치게 당당했다.
철컥.
감시창이 열리고, 사나운 눈빛이 안을 쏘아보았다.
"뭐냐, 꼬마?”
"물이 다 떨어졌어. 마실 것 좀 가져와."
소녀는 간수의 살기 어린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턱을 까딱였다.
부탁이 아니었다.
명백한 명령조였다.
“허.”
이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고압적인 태도.
간수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두려움에 떨기는커녕 거래를 하려 드는 이 맹랑한 포로에게 묘한 흥미가 동한 것이었다.
"얼마나 줄 건데? 우리 여관 물가가 좀 비싸서 말이지."
감시병이 혀로 입술을 축이며 쇠창살에 바짝 붙어 섰다.
"모자라는 돈은… 그 몸으로 대신 치러도 되는데."
노골적인 희롱.
보통의 귀족 영애라면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거나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무심하게 허공을 향해 엄지를 튕겼다.
챙!
맑고 청아한 금속음이 눅눅한 지하 감옥의 공기를 갈랐다.
소녀는 허공에서 회전하던 물체를 낚아채듯 잡았다.
그러고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감시병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묵직하게 빛나는 황금빛 광채.
"……!"
감시병들의 눈동자가 홀린 듯 그 빛을 쫓았다.
소녀는 별것 아니라는 듯, 지루한 표정으로 금화를 만지작거렸다.
"제국 금화, 1솔린이야."
그녀의 목소리엔 감정이 배제되어 있었다.
오직 거래를 제안하는 상인의 건조함만이 묻어났다.
"깨끗한 물, 그리고 천을 가져와. 거스름돈은 필요 없어."
금화 한 닢이면 평민 가족이 반년은 배를 곯지 않고 먹고살 돈이다.
고작 물 한 바가지 값으로 치르기엔 터무니없는 거금.
감시병의 입이 쩍 벌어졌다.
꿀꺽, 하고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동료 감시병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젠장, 아르젠트는 통이 크구먼."
탐욕에 눈이 멀어 무심코 튀어나온 진심.
자신들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 순간, 소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단순히 물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녀는 금화 한 닢으로 가장 중요한 정보를 샀다.
'역시, 내 정체를 알고 있어.'
어느 정도 규율은 갖추고 있으나 입단속은 허술하다.
금화 한 닢에 눈이 뒤집히는 속물적인 근성.
무엇보다 자신을 제외한 상단의 호위와 인부들을 가차 없이 도륙 낸 잔혹한 솜씨.
‘단순한 도적이 아니야.'
소녀는 머릿속으로 흩어진 조각을 맞췄다.
그녀의 정체와 몸값을 정확히 알고 움직이는 자들.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고용된, 실력 좋은 용병단이 분명했다.
적의 정체는 파악했다.
남은 건 '어떻게'의 문제였다.
"어렵네…"
소녀는 뺨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아까 용변을 핑계로 변소를 다녀오며 곁눈질로 훑어본 수도원의 풍경은 그야말로 철옹성이었다.
무너진 석벽 틈새마다 궁수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유일한 탈출구인 정문에는 견고한 목책이 이중 삼중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이미 수도원은 누군가의 침입을, 혹은 누군가의 탈출을 막기 위한 요새화를 마친 상태였다.
맨몸으로도 힘들 판국에, 옆에 있는 이 아이까지 데리고 나간다?
불가능하다.
주판을 튕겨볼 필요도 없는 '부도' 수준의 확률이었다.
"흐응."
소녀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뺨을 긁적였다.
보통의 또래라면 절망하여 울음을 터뜨렸겠지만, 그녀는 달랐다.
당장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려 감정을 소모하는 건 그녀의 방식이 아니었다.
'지금은 나설 시기가 아니야.'
그녀는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시장이 요동칠 때까지, 변수가 생길 때까지 묵묵히 버티며 기회를 노리는 것.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확실한 이득을 취하는 인내심.
그것은 타고난 상재(商才)를 지닌 그녀가 가장 잘하는 특기였다.
어둠 속에 웅크린 채 때를 기다리는 백금발의 소녀.
그녀가 바로 아르젠트 공작가의 고명딸이자, 대륙의 상인들이 경외를 담아 부르는 '황금 주판', 셀라 아르젠트였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서늘하게 번뜩였다.
마치 자신의 목숨이라는 판돈을 언제 걸어야 할지 재보는, 위태로운 '도박사'의 눈빛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