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의 전쟁론> 1부 3장 | 제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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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짙게 깔린 황량한 고원.
에드먼드와 코르반의 병력은 가도에서 벗어난, 바람과 시선을 동시에 피할 수 있는 옴폭한 와지(窪地)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
4월이라지만 고원의 밤바람은 여전히 칼날 같았다.
서늘한 바람이 병사들의 귓가를 스칠 때마다 옷깃을 여미는 소리만이 적막을 채웠다.
타닥, 타닥.
마른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
일렁이는 모닥불 불꽃이 병사들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그들의 표정에 서린 근심과 공포도 춤을 추듯 일그러졌다.
본대의 지원 하나 없이, 요새화된 적진을 뚫고 인질을 구출해야 하는 상황.
주어진 시간은 고작 하루뿐이었다.
불과 달포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밭에서 쟁기질하고, 외양간에서 여물을 쑤던 순박한 농부들이었다.
호미 대신 창을, 쟁기 대신 검을 쥐여주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전사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에드먼드는 병사들의 불안 섞인 시선을 등 뒤로 한 채, 타닥거리는 모닥불 앞에 섰다.
그리고 품에서 꼬깃꼬깃해진 양피지를 꺼내 펼쳤다.
불빛을 받아 붉게 물든 종이 위.
그가 해가 질 때까지 발로 뛰며 수집한 정보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지금까지 모인 정보를 종합해 보면, 상황은 이렇다."
습격당한 마을은 처참했다.
하지만 그 참혹함 속에 놈들의 정보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망설임 없이 일격에 급소를 찌른 상흔,
일정한 간격으로 찍힌 말발굽의 깊이,
그리고 조직적인 약탈의 흔적들.
놈들은 자신들이 지나간 자리를 굳이 지우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추격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오만이거나, 혹은 압도적인 무력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놈들은 북서쪽에서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한 무리는 채석장으로, 본대로 보이는 나머지는 더 깊은 곳, 버려진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에드먼드는 숯덩이 하나를 집어 바닥에 간략한 지도를 그렸다.
"별다른 척후를 두지 않은 걸로 봐선, 채석장 쪽은 임시 거처거나 보급 기지일 가능성이 크다. 반면 수도원은 영구적인 요새화를 노리는 것일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묵묵히 검을 닦고 있던 아르나바즈의 눈빛이 빛났다.
그러고는 나직하게 에드의 말을 이었다.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지. 한쪽은 뜨고, 한쪽은 머무르고."
"일리 있는 말입니다. 만약 이동한다면 방비가 허술한 채석장 쪽 병력이 먼저 움직이겠군요."
에드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든 정보는 에드먼드와 아르나바즈, 단 두 사람이 목숨을 걸고 적진 코앞까지 다가가 확인한 것들이었다.
가레스는 "지휘관이 직접 척후를 나가는 게 말이 되냐?"라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에드먼드는 그의 고집을 꺾었다.
곰 같은 덩치의 가레스가 풀숲에 엎드려봤자, 적들에겐 '여기 표적이 있소'라고 광고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결국 기도비닉(企圖秘匿)이 가능한 건 에드먼드와 아르나바즈뿐이었다.
에드먼드는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정찰도, 작전 수립도, 지휘도. 모든 핵심 임무가 자신에게 과도하게 쏠려 있었다.
군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역할 분담의 실패.
이는 곧 자신이 쓰러지는 순간 이 오합지졸 부대는 머리 잃은 뱀처럼 흩어져버릴 거란 뜻이었다.
'지금은.'
에드먼드는 고개를 저어 불길한 가정을 털어냈다.
영웅 놀음에 심취해서가 아니었다.
당장은 대체할 인재가 없었다.
그 불안정한 구조를 억지로라도 끌고 가서, 결과를 만들어내야만 했다.
"잡혀간 사람들이… 있을까요?"
루벤이 물었다.
평소의 장난기는 온데간데없고, 음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는 온종일 넋이 나가 있었다.
불타버린 마을, 까맣게 그을린 시신들.
생전 처음 목격한 지옥도가 아직도 망막에 들러붙어 있는 듯했다.
음유시인을 꿈꾸며 쉴 새 없이 재잘대던 청년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루벤의 노래가 멈춘 밤.
그것만으로도 부대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글쎄다."
에드먼드는 턱을 문지르며 짧게 대답했다.
면도하지 못해 까칠하게 자라난 수염이 손끝을 찔렀다.
그는 잠시 루벤을 바라보다가, 냉정하리만치 건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들의 잔혹한 방식으로는 인질이 없을 가능성이 크겠지. 있을 순 있으나, 가능성은 작다. 없다는 것을 가정하고 작전을 수행하는 편이 낫겠군.”
에드먼드의 단호한 대답에 루벤의 어깨가 눈에 띄게 처졌다.
가레스가 혀를 쯧, 하고 찼지만 위로의 말은 없었다.
에드먼드는 시선을 돌려 바닥의 지도를 가리켰다.
"요새화를 마친 수도원보다는 상대적으로 허술한 채석장을 먼저 친다. 놈들이 병력을 둘로 쪼갠 건, 우리에겐 천운이다."
적의 수는 최소 오십.
그것도 군사적 목적을 가지고 운용되는 집단.
그들이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면 에드먼드에게도 승산이 적었다.
'놈들은 방심하고 있다.'
에드먼드의 눈이 번뜩였다.
그들은 영지 내의 병력이 징집으로 인해 텅 비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빈집 털이나 다름없는 약탈.
방해꾼이 없을 거라는 오만함.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빈틈이었다.
승산 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그것은 겁쟁이의 변명이 아닌, 반드시 이길 전장만 골라서 싸우는 지휘관의 철칙이었다.
"좋아. 목표는 채석장이다."
에드먼드는 주먹을 쥐어 보이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승리에 취해 있는 그들에게, 잊지 못할 특별한 선물을 안겨주도록 하자.”
에드먼드의 너스레 섞인 농담에 병사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실전의 공포로 딱딱하게 굳어있던 어깨들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에드먼드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발치에 둔 배낭을 열었다.
주섬주섬.
그가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루벤의 눈이 동그래졌다.
“옷이네요?”
“어떤 옷이냐가 관건이지. 이건 귀중한 전략적 자산이다.”
에드먼드의 손에 들린 건 알록달록한 치마와 품이 넓은 상의였다.
촌스럽지만 눈에 확 띄는 색감.
불타버린 마을의 폐허 속에서 에드먼드가 직접 수습해 온 물건들이었다.
한때는 누군가의 몸에서 곱게 빛났을 테지만, 지금은 주인 잃은 유품이 되어버린 옷가지들.
준비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닥불 곁에는 삐걱거리는 중형 수레 한 대와, 마을 근처를 배회하다 잡혀 온 누렁소 한 마리가 얌전히 앉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소는 자신의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크고 순박한 눈망울로 모닥불만 껌벅거릴 뿐이었다.
여자 옷을 손에 들고, 옆에는 소와 수레를 둔 우스꽝스러운 광경.
하지만 에드먼드의 표정만큼은 사뭇 진지했다.
타오르는 불빛을 받아 붉게 물든 그의 얼굴에는 치열하게 승부를 계산하는 지휘관의 고뇌가 서려 있었다.
에드먼드의 시선이 루벤에게 꽂혔다.
"루벤. 이건 너만이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임무다."
비장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루벤의 어깨가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청년의 표정이 단단하게 굳었다.
낮에 목격한 참상의 기억.
망설임은 분노로, 분노는 다시 서슬 퍼런 열의로 타올랐다.
루벤의 눈동자가 밤하늘의 별보다 더 또렷하게 빛났다.
“할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훌륭한 마음가짐이야. 모두의 본이 되겠어.”
에드먼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던 옷 뭉치를 루벤의 품에 턱, 하고 안겼다.
루벤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화려한 치마, 그리고 나풀거리는 레이스가 달린 상의.
루벤은 눈을 껌뻑이며 자신의 품과 에드먼드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예?”
에드먼드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입어라. 이제 밤 나들이를 간다.”
에드먼드는 태연했다.
루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건 말건, 야간 기습 작전의 톱니바퀴는 이미 숨 가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제기랄, 빌어먹을, 망할 놈의 레이스…"
깊은 밤.
고요한 정적을 깨고 걸걸한 육두문자가 흘러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달빛 아래서 보면 꽤 곱상한 자태의 처녀였다.
장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치렁치렁한 장식이 달린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
하지만 행동거지는 전혀 조신하지 못했다.
그녀, 아니 그는 불편한 치맛자락을 신경질적으로 걷어차며, 자신에게 이 꼴을 입힌 누군가를 끊임없이 저주하고 있었다.
“입이 거친 레이디군.”
“죽을래?”
밤공기를 가르는 봄 처녀의 살벌한 협박.
다름 아닌 루벤이었다.
그는 지금 터너가 모는 낡은 소달구지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작전 지역인 채석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겉보기엔 밤마실을 나가는 수줍은 처녀의 행색이었으나, 그 속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보다 더 억울하고 분노에 차 있었다.
"후우…"
루벤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죽기보다 싫었지만, 실패하면 진짜로 죽는다는 생각에 억지로 조신함을 뽐내고 있을 뿐이었다.
… 시간을 잠시 거슬러, 작전 회의 직후.
에드먼드는 '대륙의 전설이 될 음유시인'에게 여장(女裝)이라는 가혹한 시련을 내렸다.
"싫어! 제발, 그거 치워! 안 입는다고!"
루벤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곰 같은 사내 둘을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가레스와 데니스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를 덮쳤다.
"가만있어 봐, 이 녀석아. 대업을 위한 희생이라 생각하라고."
"옳지, 예쁘다. 오구오구."
"꺄아악!"
루벤은 태어나 처음으로 정조의 위기(?)를 느꼈다.
가레스는 낄낄거리며 딱딱하게 굳은 납작한 빵 두 덩이를 루벤의 가슴팍에 쑤셔 넣었다.
"여자는 곡선이 생명이지."
“윽, 윽!”
순식간에 바지가 벗겨지고, 나풀거리는 치마가 입혀졌다.
마른 체형이라 얼추 맞긴 했으나, 남자의 골격 탓에 어깨 부분이 꽉 끼어 비명을 질렀다.
그때, 구경하던 아르나바즈가 단검을 뽑아 들고 다가왔다.
그리곤 그녀의 단검은 옷의 등판을 거침없이 갈랐다.
“당신까지 이러기야!"
"그렇지만 재밌는걸."
그녀는 킥 웃음을 지으며 루벤의 등을 팡, 쳤다.
평소의 차분함은 사라졌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가레스와 합세해 인형 놀이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시선으로 매무새를 다듬자, 제법 그럴싸한 태가 나기 시작했다.
에드먼드는 팔짱을 낀 채 그 난장판을 담담하게 감상할 뿐이었다.
잠시 후.
아르나바즈가 손에 묻은 가루를 탁탁 털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 됐다."
물기를 적셔 차분하게 내린 머리카락.
그리고 하얗게 분칠된 얼굴.
아르나바즈가 평소 치아 관리를 위해 쓰던 허브 가루를 얼굴에 펴 바른 덕분에, 땀 냄새 대신 향긋한 향이 루벤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순간, 모두의 시간이 멈췄다.
"……"
어스름한 불빛 아래 선 자태는 영락없는 '고원의 꽃'이었다.
가녀린 어깨선과 하얗게 분칠된 얼굴, 그리고 수줍게 내리깐 속눈썹까지.
전체적으로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태가 물씬 풍겼다.
정작 당사자인 루벤은 치마 밑으로 숭숭 들어오는 밤바람이 영 적응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안 돼, 보지 마…"
그는 양손으로 치마 앞자락을 꾹 누르며 다리를 배배 꼬았다.
"허어."
누군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터너의 눈은 까만 밤에도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반짝였다.
"루벤… 네가 너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난 아마…"
"다, 닥쳐! 닥치란 말야!"
터너의 수줍은 고백이 채 끝나기도 전, 루벤의 입에서 걸걸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고운 자태에서 나온 거친 말.
그 완벽한 부조화에 긴장해 있던 병사들이 참지 못하고 배를 잡고 폭소를 터뜨렸다.
비명과 환호, 야유가 뒤섞인 밤.
병사들은 배를 잡고 뒹굴었지만, 에드먼드의 눈빛만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대는 갖춰졌다.
이제 '아름다운 미끼'를, 굶주린 늑대들의 아가리 속으로 밀어 넣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