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의 기만극

<설계자의 전쟁론> 1부 3장 | 제26화

by 밍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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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의 전쟁론>

1부. 광휘재림(光輝再臨)

3장. 작은 불꽃들

26화. 달빛 아래의 기만극




추천BGM

출처 : Youtube_The Riverside Tavern취향에 따라 들어주세요 :)


"살아서 돌아가면 활로 다 쏴버릴 거야. 도련님이고 뭐고…"

"활시위를 당기시다니, 레이디의 품격이로군."

"제발, 그만 좀 해…"


루벤이 울먹이며 대꾸하자 고삐를 쥔 터너가 킬킬거리며 솔직한 감상평을 남겼다.


“우리 마누라보다 낫다.”

“악!”


농담을 주고받고 있지만 두 사람의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숲길.

등 뒤의 풀숲을 따라 코르반의 병사들이 은밀히 따라붙고 있다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적진 한복판에 미끼로 던져지는 공포는 온전히 두 사람의 몫이었다.


덜컹, 덜컹.

수레바퀴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루벤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아까 들었던 에드먼드의 작전 내용을 필사적으로 되뇌었다.


놈들은 굶주려 있다.

모닥불 앞에서 에드먼드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었다.


“이들은 유희에 굶주려 있다. 그러니 단순한 짐마차보단 아리따운 처녀가 더 탐나겠지.”


에드먼드의 시선이 묘한 웃음기와 함께 루벤을 훑고 지나갔었다.

루벤이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획 돌렸다.

에드먼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단순한 짐마차는 경계심을 부르지만, 길을 잃은 아리따운 처녀는 경계심 대신 탐욕을 부른다. 놈들의 이성이 마비되는 그 찰나의 순간이 바로 우리의 승부처다."


에드먼드는 담담한 표정으로 이번엔 아르나바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르나바즈가 가장 적임자일 수도 있지. 하지만 그녀는 우리의 가장 날카로운 검이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주공(主攻)을 맡아야 할 핵심 전력을 미끼로 쓸 순 없다. 그녀가 빠지면 채석장 돌파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러니 차선책으로…”


에드먼드의 눈길이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잔인하게 루벤에게로 돌아왔다.


"우리 중 가장 선이 고운 루벤이 고생을 도맡게 되었다. 그들은 길 잃은 한밤중의 처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신사들일 테다. 루벤, 터너. 너희들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사뭇 진지한 그의 표정에 투덜거리던 루벤도, 낄낄거리던 터너도 입을 다물었다.


“그 틈에 가레스, 아르나바즈, 그리고 내가 채석장의 정문을 연다. 데니스, 자네는 채석장 주변 퇴로마다 오 인의 병력을 매복시켜. 반드시 궁수 하나를 포함해서.”


에드먼드의 목소리에 데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모두를 돌아보며 당부하듯 신중하게 말했다.


“절대 적을 일대일로 상대하지 마라. 차라리 도주로를 열어줘도 좋다. 반드시 두 명, 아니 세 명이 달라붙어 하나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데니스와 병사들은 창을 꽉 쥐며 결의에 찬 대답을 토해냈다.


모든 지시가 끝났다.

에드먼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를 털어냈다.

사지(死地)로 들어가는 길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밤마실이라도 나가는 듯 가벼웠다.


“좋아. 이제 시작해 볼까. 루벤, 터너. 선두를 부탁한다.”

“흥.”


루벤은 여전히 입이 댓 발 나온 채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그 삐침은 오래가지 않았다.


잿더미가 된 민가.

감기지 못한 죽은 이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린 청년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 최선을 다할게요. 아니, 반드시 해낼게요.”

“믿음직한 레이디로군.”

“아, 진짜! 도련님!”


병사들 사이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긴장과 공포를 몰아내는 유쾌한 웃음소리.


그것은 그 어떤 웅장한 진군가보다 힘차게 울려 퍼지는, 코르반 부대만의 특별한 출정 나팔 소리였다.




"전방. 둘이다."


터너의 낮고 긴장된 목소리가 루벤의 귓가를 때렸다.

어둠 속에서 희번덕거리는 창끝이 보였다.

경계를 서던 병사 두 명이 인기척을 느끼고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멈춰! 누구냐!"


서슬 퍼런 고함.

루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려던 찰나였다.

터너가 선수를 쳤다.


"아이고, 기사 나리들! 이게 웬 행운입니까! 오, 거룩한 성화시여!"


터너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잔뜩 겁을 집어먹었으면서도, 누군가를 만나 반가워 죽겠다는 시골 촌부의 목소리.


능청스럽고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루벤은 떨리는 다리를 다잡으며 혀를 내둘렀다.


터너의 비굴하고도 반가운 외침에 병사들의 창끝이 스르르 바닥으로 향했다.


덜컹거리는 소달구지.

가까워지는 그들의 거리.


병사들은 볼품없는 행색의 터너를 한번 훑어보았다.

그리고 당연한 순서처럼, 달구지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여인'에게 꽂혔다.


"호오."


병사들의 눈빛이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에드먼드의 예언대로, 굶주린 짐승들이 먹잇감을 발견한 눈빛이었다.


터너는 소달구지를 끌고 와 수풀 옆에 멈춰 세웠다.

그러고는 하소연하듯 느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동생이랑 친척 집에 가는 길이었는데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죠. 이렇게 기사님들을 뵙게 된 것도 성화의 인도인 것 같습니다.”

“이 밤중에 무슨 일로 숲길을 지나간단 말인가?”


무장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남자가 한밤중에 소달구지에 여자 하나 태우고 길을 떠난다니.

초조해진 루벤이 그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터너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으리들. 진실로 말씀드리자면 사실 동생이 아닙니다. 제… 연인입니다.”


순식간에 동생에서 연인으로 신분이 바뀐 루벤은 눈만 동그랗게 떴다.

터너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다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집안의 반대로 도망치듯 나온 길입니다.”

“그렇군.”


병사들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는 비릿한 웃음이 어렸다.


야반도주.

깊은 밤, 소달구지, 허겁지겁 나온 것 같은 차림새까지.

모든 것이 그럴싸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병사들은 채석장 입구 쪽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이봐! 길 잃은 연인들이 오셨다! 방을 따뜻하게 데워라!”


보초의 외침에 채석장 안쪽이 곧 분주해졌다.

이윽고 잔뜩 취한 병사들 대여섯 명이 비틀거리며 입구 쪽으로 걸어 나왔다.

무구를 손에 쥐고는 있었지만 손끝에는 힘이 없었다.


“길 잃은 손님들 따뜻하게 재워 보내는 게 우리 전통이지.”


보초 하나가 안쪽을 향해 다시 고함쳤다.


“어이, 안에 굴러다니는 놈들은 재미 안 볼 거냐? 반밖에 안 나왔잖아!”


루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결정적인 한 마디였다.

아마 에드먼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으리라.


입구로 나온 인원은 여덟 명.

그 절반이 덜 나왔다면, 채석장 안에는 최소 여덟 명 이상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입구로 나온 놈들보다 더 고주망태일 가능성이 컸다.


터너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얼굴로 몸을 떨었다.


“나리들, 왜 그러십니까요…”

“별건 아니다. 네 연인이 밤바람에 감기라도 걸리면 기사로서 실격이지.”


보초 하나가 들고 있던 칼끝을 조금씩 치켜들었다.

나머지 일곱은 천천히, 루벤이 탄 소달구지를 향해 발을 옮겼다.


채석장 입구의 병사들은 서서히 루벤 쪽으로 스며들었다.

루벤과의 거리가 열 보도 채 남지 않았다.


루벤의 다리가 다시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두 손이 양 허벅지 위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흐…”


그들의 손이 루벤의 어깨로 뻗어 오기 직전, 더는 버티지 못한 루벤의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도련니이임!”


텅!


수풀을 가르며 튀어나온 굵은 화살대가 한 병사의 가슴을 정통으로 꿰뚫었다.

거의 몸을 반쯤 뚫고 나가 화살촉이 등 뒤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화살에 맞은 병사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곧이어 화살 두 대가 연달아 밤공기를 가르며 날았다.

이번에는 적들의 목과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켁!”

“으악!”


세 명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저, 적이다!”


제일 먼저 수풀을 헤치고 튀어나온 것은, 거대한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민첩한 움직임을 보인 가레스였다.



그는 왼팔에 든 원형 방패를 내밀며 정면의 적에게 몸통 박치기하듯 들이받았다.


“컥…”


콰직!


들이받힌 병사의 몸이 허공을 날아 반대편 나무 둥치에 처박혔다.

목이 꺾인 채 비참하게 나동그라진 그 시체를 보는 순간, 남은 자들의 눈에 공포가 번졌다.


가레스의 넓은 등 뒤로 숨듯, 그림자를 밟고 내려온 흰 털옷의 아르나바즈가 순식간에 적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쌍곡도가 번개처럼 발도 되었다.

양손에 역수로 쥔 두 자루의 검이 한 줄기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첫 번째 검격에 적병의 목이 허공으로 날아오른 순간, 은빛 검신 위로 달빛이 쪼개져 흩어졌다.


“히익!”


이어서 에드먼드가 수풀을 헤치고 뛰어나왔다.

그러나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몇 번이나 헛걸음을 했다.

그는 몸을 추스르고 가문의 보도를 움켜쥔 채 다시 앞으로 돌진했다.


가레스가 단검을 뽑아 보초들에게 던졌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단검이 보초 하나의 목에 정확히 박혔다.

피가 분수처럼 치솟으며 그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남은 보초는 그대로 채석장 안으로 줄행랑을 쳤다.


“도망쳐! 적습이다!”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채석장 안쪽에 등불이 켜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그 틈을 읽은 에드먼드가 아르나바즈를 향해 소리쳤다.


“아르나바즈!”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땅을 스치는 제비처럼 채석장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에드먼드는 적의 칼을 간신히 피하고는 팔에 온 체중을 실어 롱소드를 깊게 꽂아 넣었다.

뼈와 살을 가르는 불쾌한 감각. 에드먼드의 손이 짧게 떨렸다.


살인의 감상에 젖을 시간은 나중으로 미뤘다.

그는 튀어 오르는 피를 그대로 맞으며 앞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으아악!”


곧 채석장 안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르나바즈가 이미 날뛰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레스는 입구의 마지막 병사의 목을 그어 옆으로 내던지고, 곧장 채석장 안으로 몸을 날렸다.


에드먼드는 가레스의 넓은 등을 따라 채석장 안으로 진입했다.

폐허가 된 채석장 바닥 곳곳에 피 웅덩이가 번지고 있었다.


“커억…”

“뭐야! 어억!”


두 사람은 아르나바즈에게 합류해 술에 절어 비틀거리는 적병들을 마저 베어 넘어뜨리기 시작했다.


에드먼드의 예상대로 채석장 안의 적병은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입구에서 쓰러뜨린 병력까지 합치면 스무 명 남짓.

거기에 수도원 가는 길목마다 매복을 심어 두었으니, 달아나는 자들이 있어도 무리 없이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가레스가 마지막까지 버티던 적병의 가슴을 발로 걷어차 쓰러뜨린 뒤, 검을 목에 꽂아 넣었다.


피거품을 물고 몸을 비트는 모습을 확인하곤 검신을 한 차례 강하게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폼멜에 맺혀 있던 핏방울이 바닥에 촤락, 흩어졌다.


“후우. 간만이라 숨이 차는군.”


가레스가 넉살을 떨었다.


에드먼드는 형편없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거칠어진 호흡을 애써 억눌렀다.


지금은 쉬는 일이 먼저가 아니었다.

포위망부터 확인해야 했다.


잔뜩 찌푸린 구름 사이로 달빛이 한 줄기 스며 내렸다.

에드먼드는 그 빛을 힐끗 올려다보더니, 피가 튄 눈가를 손등으로 대충 문질러 닦았다.


피는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채석장은 고작 전초전일 뿐이었다.

진짜 전투는 저 너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숨죽인 채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