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의 전쟁론> 1부 3장 | 제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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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나바즈와 가레스가 채석장 안팎의 시신을 확인하는 사이.
에드먼드는 매복 지점을 훑어보았다.
수도원 쪽으로 도망쳐 나오다 걸린 적병은 두 명뿐이었다.
놓친 자가 더 있을 수도 있었다.
일부러 퇴로를 헐겁게 열어 둔 터라 누군가는 빠져나갔을 가능성이 있었다.
에드먼드는 매복에 쓰러진 병사들의 품을 뒤졌다.
서신이나 봉인, 신분을 짐작할 만한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단 하나.
매복에 걸린 자들 품속에서 제국 금화가 한 닢씩 나왔다.
이 무도한 짓이 셀레스티움 제국과 엮여 있는 걸까.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제국 금화는 국제 교역의 기축 통화였다.
그 정도로 널리 쓰이는 화폐라면 어딜 가든 돌고 돌 수 있었다.
병사들이 차례로 채석장 입구 쪽으로 모였다.
시체들은 모두 채석장 안으로 옮겨 두었다.
피 냄새까지 감출 순 없었지만,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게 널브러져 있을 필요는 없었다.
에드먼드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 우두머리는 하나겠군.”
에드먼드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런데 왜 굳이 둘로 나눴을까.”
“수도원 방이 좁았던 거 아닐까요?”
루벤이 중얼거리자 터너가 헛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글쎄, 하는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벤 말대로일지도. 이 병력이 한꺼번에 눌러앉기엔 수도원이 비좁았을 수도 있지.”
실제로 두 집단에 따로 우두머리를 붙여 통솔하게 하진 않았다.
언제든 합류시킬 생각으로 쪼개 두었을 수도 있다.
혹은 루벤 말처럼, 그들을 한꺼번에 수용하기엔 수도원이 작았을 수도 있었다.
에드먼드는 아까 한 번 접어두었던 가정을 다시 꺼내 들었다.
"포로의 존재 가능성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만약 그렇다면 수도원 공략은 훨씬 더 신중해야 했다.
이번 채석장처럼 요행에 기대어 밀어붙이는 방식으론 부족했다.
한 단계 다른 수준의 세심한 전략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이 승리의 기쁨까지 말릴 이유는 없었다.
에드먼드는 어둠 속에 서 있는 코르반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사상자 없이 살아남은 얼굴들이었다.
“절반은 해치운 셈이군.”
안도의 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실제로 피를 묻힌 이는 에드먼드와 가레스, 아르나바즈뿐이었다.
'첫 실전치고는 아주 좋은 출발이다.'
에드먼드는 그렇게 스스로 평을 내린 뒤, 머릿속으로 다음 작전을 그려 나갔다.
그전에, 그는 빙긋 웃으며 루벤을 돌아보았다.
“꽤 마음에 들었나 보지.”
“예? 으아악, 악악!”
루벤이 기겁하며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자, 에드먼드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몰래 한 벌 더 구해 줄까.”
“필요 없어요!”
웃음이 공기처럼 퍼졌다.
에드먼드의 농담에 병사들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한바탕 웃음이 번지고 나서야, 모두의 표정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밤은, 지금 이들 곁에 있는 가장 든든한 아군이었다.
스산한 밤바람이 능선을 훑고 지나갔다.
세 사람의 인영(人影)이 협지의 능선에 납작 엎드린 채, 아래의 수도원을 주시하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죽인 고요함 속.
에드먼드와 가레스, 아르나바즈만이 산등성이 너머로 고개를 살짝 내밀어 적진을 살폈다.
“휘유. 공기부터가 다르군.”
가레스가 낮게 이죽거렸다.
채석장의 오합지졸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협지 위, 적들의 숨통을 쥔 능선 꼭대기.
그곳에는 횃불을 든 정찰병 두 무리가 사각지대를 쓸어가듯 경계하고 있었다.
모두 네 명.
허술함이 없는 배치였다.
작전이 시작되면 저 네 명의 목을 소리 없이 처리해야 한다.
놈들은 성화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예약된 행선지는 지옥뿐이었다.
에드먼드의 시선이 매섭게 수도원을 훑었다.
일렁이는 횃불 사이로 드러나는 무장 상태가 예사롭지 않았다.
요충지마다 한두 명의 궁수가 서 있고 창병들이 질서 있게 순찰했다.
채석장 놈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규율.
제대로 된 '군대'였다.
“완전히 요새화됐군요.”
에드먼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방이 막힌 협지의 성소.
그런 곳을 정면으로 두드리는 싸움.
지휘관이라면 피하고 싶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필연적으로 아군의 피를 요구하는 전투.
요새는 존재만으로도 공격자를 짓눌렀다.
말 없는 압박이 위에서 내려 꽂혔다.
가레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데.”
아르나바즈조차 짧은 한숨을 내쉬며 에드먼드를 바라봤다.
“왕가의 토벌군을 기다리는 게 어떨까. 굳이 우리가 피를 볼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에드먼드는 그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토벌군이 도착할 때쯤이면 늦을 것 같습니다.”
“늦다니?”
에드먼드는 작은 손짓을 곁들이며 두 사람에게 설명했다.
“창문이 모두 막혀 있어요. 시야 확보라는 방어의 이점을 포기하면서까지 내부를 가린 겁니다. 저건 마치 누군가를 감금하는 모양새입니다.”
단순한 도적 떼라면 병참선 한복판에 이런 요란한 진지를 구축하지 않는다.
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버티고 있다는 건 무언가를, 아니...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뜻이었다.
‘거래인가.’
중요한 인질을 넘기고 그 값어치를 몽땅 받아낼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만약 토벌군이 포위망을 좁혀 오면, 놈들은 인질을 방패로 삼거나 증거 인멸을 위해 죽일 겁니다. 그전에 거래자가 도착해 인질을 빼돌린다면, 우리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겠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의 머릿속은 오히려 명쾌해졌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에드먼드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급박한 상황이 아닌 이상 인질을 해치진 않을 겁니다. 그 점을 전제로 작전에 들어가겠습니다.”
“어떤 기적을 보여줄 거지? 마레움의 영웅은.”
아르나바즈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에드먼드는 그녀의 짓궂은 질문에 빙긋 웃어 보였다.
“간단합니다. 놈들의 본능을 먼저 치겠습니다. ‘공포’라는 전염병으로.”
에드먼드는 곧바로 능선에서 후사면으로 내려와 병사들과 합류했다.
어둠 속에서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는 코르반의 병사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지휘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불과 일주일.
그 짧은 시간 동안 그가 보여준 기적 같은 승리들이 만든 믿음이었다.
에드먼드는 즉시 움직였다.
그는 별동대를 조직해 능선 후사면의 어둠 속으로 보냈다.
병사들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아마포를 찢어 돼지기름을 듬뿍 적셨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간이 횃불이 만들어졌다.
나팔수와 징을 든 병사들도 신호를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교란 준비는 끝났다.
남은 건 적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 것.
능선 위를 감시하는 정찰병을 소리 없이 처리해야 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 사격이었다.
그때, 루벤이 머뭇거리며 가레스에게 다가왔다.
“이거… 빌려줄게요.”
루벤이 내민 것은 은화 스무 닢을 주고 산 전투용 강궁이었다.
영지를 떠나와 한 번도 품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던 활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활이 가장 절실한 사람은 가레스였다.
가레스는 루벤의 눈을 잠시 묵묵히 바라보더니 군말 없이 활을 받아 들었다.
“좋은 활이지. 잘 쓰마.”
바람은 잠잠했다.
가레스와 아르나바즈는 그림자처럼 능선을 기어올라 첫 번째 정찰조를 겨눴다.
팽팽히 당겨진 시위가 한계점까지 휘어졌다.
텅!
짧은 파열음과 함께 두 발의 화살이 시차 없이 어둠을 갈랐다.
목을 꿰뚫린 적병들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허수아비처럼 쓰러졌다.
이어진 두 번째 사격 역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머지 정찰조의 숨통을 끊었다.
소름이 돋을 만큼 정확한 사격 솜씨였다.
상황이 종료되자 가레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루벤에게 활을 던져주었다.
“역시 강궁이군. 네놈 손에 들려있기엔 아까운 물건이야.”
“절대 안 줄 거니까 꿈도 꾸지 마요!”
혹여 뺏길까 봐 황급히 활을 낚아채 품에 끌어안는 루벤.
전장과 어울리지 않는 철부지 같은 모습이었다.
가레스는 피식 웃으며 커다란 손으로 루벤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알았다, 인마. 관리나 잘해 놔라.”
정찰병은 모두 제거됐다.
이제부터는 진짜 시간 싸움이었다.
놈들이 정기적으로 보내는 신호가 끊기면 아래쪽 본대는 곧 이변을 눈치챌 것이다.
모래시계는 이미 뒤집혔다.
“이동한다.”
에드먼드의 신호에 타격대는 능선을 타고 미끄러지듯 수도원 쪽으로 내려갔다.
가파른 경사였지만, 짙게 깔린 어둠이 그들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삼켜 주고 있었다.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는 침투의 순간.
맨 뒤를 따르던 루벤은 다리를 사시나무처럼 떨면서도 입으로는 짐짓 근엄한 척 중얼거렸다.
"… 활이 울고 있었다. 전설이 될 순간을 기다리면서"
가레스의 낮은 윽박에 루벤은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여유가 조금만 더 있었다면, 그의 머리 위에는 커다란 혹이 하나 더 자라났을 것이다.
잠시 시간을 되돌려, 수도원에 도착하기 전.
채석장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에드먼드는 바닥에서 흥미로운 흔적을 발견했다.
끈적한 핏자국이 수도원 방향으로 비틀거리며 이어져 있었다.
에드먼드는 쭈그리고 앉아 흙을 만져보았다.
아직 축축했다.
“출혈량이 상당하군요. 보폭이 불규칙한 걸 보니 다리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놓친 놈이 있었나? 젠장, 지금이라도 쫓아가서 입을 막아야…”
가레스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지만, 에드먼드는 고개를 저으며 차갑게 웃었다.
“아뇨. 놔두십시오. 이 자는 우리의 전령입니다.”
“전령?”
에드먼드의 미소는 달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더욱 이질적으로 보였다.
“가장 확실한 ‘공포’를 가져다줄 훌륭한 배달부죠.”
멀쩡한 전령보다, 피 칠갑이 된 패잔병 하나가 더 오래 남는다.
공포는 이성보다 먼저 퍼진다.
더 빨리, 더 깊게.
문제는 ‘시기’였다.
놈이 공포를 퍼뜨리는 그 혼란의 순간을 덮쳐야 했다.
에드먼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도원으로 이어지는 험준한 능선을 가리켰다.
"바로 능선을 타고 이동합니다. 야간이라 쉽진 않겠지만, 저자보다 먼저 수도원에 도착해야 합니다."
다친 놈보다 먼저 멀쩡히 빠져나간 적병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계획은 어그러진다.
하지만 그것까지 따져 볼 여유는 없었다.
주어진 정보 안에서 최선의 수를 둔다.
그것이 에드먼드의 방식이었다.
죽기 살기로 능선을 주파해 도착한 수도원은 다행히 아직 적막에 싸여 있었다.
가레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혀를 내둘렀다.
“거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놈이 피를 흘리며 절뚝거릴 속도와 우리가 산을 타는 속도.
그 미세한 오차까지 계산해, 정확히 이 ‘폭풍 전야'의 순간에 도착하게 만들다니.
계산은 끝났다.
이제 곧 도착할 '공포의 전령'이 저 고요를 비명으로 깨트리는 순간, 진짜 사냥이 시작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