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인의 전쟁

<설계자의 전쟁론> 1부 3장 | 제28화

by 밍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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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의 전쟁론>

1부. 광휘재림(光輝再臨)

3장. 작은 불꽃들

28화. 상인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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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Youtube_The Medieval Inn 취향에 따라 들어주세요 :)


차가운 돌바닥 위.

셀라 아르젠트는 밖이 부산스러워진 것을 느꼈다.


‘이동인가?’


그것은 곧 셀라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의미했다.


“침착해… 셀라.”


큰 판돈이 걸린 거래를 앞두고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이었다.


경우의 수는 둘.


하나.

놈들의 목적이 오직 ‘셀라 아르젠트’ 개인일 경우.

이들은 이동에 앞서 의뢰주에게 직접 자신을 인계하려 들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다.


둘.

광범위한 납치와 약탈이 목적인 경우.

그렇다면 자신을 안전한 곳으로 옮긴 뒤 아르젠트 가문과 몸값 흥정을 시도할 터였다.


후자라면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전자라면.


‘게다가 이곳은 수도와 최전방을 잇는 병참선 부근이야.’


징집령까지 떨어진 마당에, 왕국의 동맥과도 같은 곳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대규모 토벌군이 들이닥칠 명분은 충분했다.


즉, 놈들도 쫓기고 있다는 뜻이다.


‘이쪽의 패가 나쁘지 않아.’


외부의 압박은 곧 내부의 틈이 된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고는 굳게 닫힌 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봐, 밖에!”


잠시 뒤.

감시창이 거칠게 열리며 날카로운 눈빛이 쏟아졌다.


“망할 꼬마가… 이번엔 또 뭐야. 오줌이냐.”


셀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갑게 받아쳤다.


“너희 대장을 만나게 해줘. 할 말이 있어.”


남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허? 이 계집이 돌았나. 잠꼬대는 자면서 해라.”

“잠꼬대가 아니야. ‘아르젠트’에 대해 할 말이 있어. 그건 너 같은 말단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지.”


사내의 시선이 옆에 선 동료에게로 스쳤다.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둘은 짧게 눈을 맞추고는, 다시 감시창 너머로 으르렁거렸다.


“… 허튼수작이면 그 건방진 혀를 뽑아 버릴 거다.”


걸려들었다.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패, ‘아르젠트’라는 이름값이 먹혀든 것이다.


그녀는 초조함을 감추려는 듯 품속의 금화를 만지작거렸다.


선명할 만큼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그 차가움으로 정신을 다시 날카롭게 세우면서.




낡은 나무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문밖에는 또다른 병사 하나가 서 있었다.

그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셀라를 노려보았다.


“허튼수작 부리면 알지?”

“아르젠트의 공녀는 그런 짓 안 해.”


셀라가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자, 병사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셀라는 그들을 지나치다 문득 멈춰 섰다.

방구석에 웅크린 채 자는 붉은 머리 소녀.


순간, 상인으로서의 냉정함이 흔들렸다.


“저 아이, 절대 건드리지 마.”


간수들이 낄낄거리면서 고간을 손으로 잡는 시늉을 하였다.

셀라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거래도 끝이야.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희들을 죽여버릴 거야.”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적인 기백.

왕국을 지탱하는 공작가의 영애만이 풍길 수 있는 위엄이었다.


경비들이 멈칫하자, 셀라를 데리러 온 병사가 뒤에서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분께 목이 달아나기 싫으면 똑바로 처신해.”

“쳇… 알겠습니다.”


‘그분’이라는 단어에 담긴 공포.

그리고 ‘상품’을 다루는 자들의 철저한 태도.


셀라의 뇌리를 스치는 위화감이 있었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나?’


자신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이유는 많았다.


하지만 저 아이는?

이들은 아이라고 자비를 베풀 만한 부류가 절대 아니었다.


불길함이 발끝부터 차오르는 듯했지만, 더 곱씹을 여유는 없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남은 것은 상인으로서 싸우는 일뿐.


셀라는 복잡한 심경을 갈무리하고, 안내병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병사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수도원 2층이었다.


닳고 닳은 돌계단 위.

반쯤 무너진 벽 너머로 잿빛 하늘이 보였다.


생애 최대의 거래.

판돈은 자신의 목숨이었다.


실패는 곧 죽음뿐인 도박.

손에 쥔 패라고는 단편적인 정보와 얄팍한 추론뿐이었지만, 그녀는 기어이 판돈을 밀어 넣어야 했다.


“후우.”


셀라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심호흡했다.

평소 신을 찾는 편은 아니었으나, 이번만큼은 본능적으로 두 손을 모았다.


절반은 그녀의 판단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성화의 기적에 기대야만 했다.


‘부디 굽어살피소서.’


그녀는 성호를 그으며 요동치는 심장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병사가 문을 열자, 그녀는 떨리는 발끝을 어둠 속으로 내디뎠다.


방은 과거 누군가의 집무실로 쓰였던 곳인 듯했다.

그 중앙, 책상 위에 거만하게 두 발을 올리고 앉은 사내가 있었다.



그리 큰 체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른 몸에 가까웠으나,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 근육은 밧줄처럼 단단하게 꼬여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보이는 무심한 표정.

언제든 상대를 물어뜯을 준비가 된 맹수의 여유였다.


셀라는 공포를 지우고 그 위에 익숙한 ‘상인의 가면’을 덮어썼다.


“당신이 대장이야?”

“반가운 척은 집어치우고. 본론만 꺼내시지.”


셀라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몸에 밴 감각을 깨웠다.


“좋아. 말귀가 빠른 거래처는 언제나 환영이지. 단도직입적으로 제안할게.”


셀라는 잠시 뜸을 들여, 상대의 시선을 자기 입술에 붙들어 놓았다.


“나를 사. 의뢰주가 얼마를 불렀든, 그 금액의 세 배를 주지.”

“… 허.”


남자는 입매만 비틀며 건조하게 웃었다.


“네가 뭔데?”

“모른 척하지 마. 내가 ‘아르젠트’라는 걸 알고 납치한 거잖아.”


남자는 입술의 끝을 혀로 훑었다.

그러고는 히죽 웃음을 지었다.


“돈 많은 공작가 영애라는 거?”

“하나 빠졌어. ‘왕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셀라의 당돌한 정정에 남자가 픽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상대로 체구는 작았지만, 그가 내뿜는 위압감은 결코 작지 않았다.

셀라는 그 기세에 눌리지 않고 차분하게 다음 패를 꺼내 들었다.


“돈으로 부족하다면 당신의 목숨값은 어때.”

“……”


셀라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이어 갔다.


“전시 상황이야. 병참선에서 핵심 귀족이 납치됐다? 곧 토벌대가 들이닥칠 거야.”


그녀의 부친인 아르젠트 공작은 상업적 수완만큼이나 딸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남자였다.


납치된지 사흘째.

이미 아르젠트와 왕국군이 이 일대를 이 잡듯 뒤지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러니 선택해. 챙길 수 있는 걸 챙겨서 떠날지, 아니면 토벌군과 아르젠트 사이에서 개죽음을 당할지.”


당근과 채찍.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침묵 후에 찾아온 낮은 웃음소리였다.


“크흐흐.”


남자의 어깨가 들썩였다.

적막한 수도원 천장에 메아리칠 만큼 유쾌한 웃음이었다.


셀라의 등에 축축한 땀방울이 맺혔다.


“흐흐… 크흐흐.”


한참을 웃던 남자가 눈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입을 열었다.


“그래. 돈 많은 공작가의 영애라… 확실히 혹할 만한 제안이군. 똑똑해.”

“……”


셀라는 신중하게 남자의 표정을 훑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공녀 아가씨. 질문 하나 해도 돼?”

“뭔데?”


셀라는 태연한 척 되물었다.


협상이 먹힌 걸까.

아니면 흥정이 부족한 걸까.


거액의 계약을 앞둔 상인처럼, 그녀는 남자의 미세한 표정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 했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목까지 차올랐다.


이윽고 남자가 지은 표정은 셀라의 예상을 빗나간 결과였다.

먹이사슬 꼭대기에 선 포식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먹이를 내려다볼 때 짓는 비릿한 미소.


“황금 주판의 피는 금화처럼 반짝이는가?”

“뭐?”


남자의 눈동자에 홍염이 어렸다.


“아니면 우리 같은 놈들처럼 시뻘건 색일지 말이야.”


섬뜩한 호기심.

셀라의 동공이 흔들렸다.


남자는 천천히, 마치 먹잇감을 구석으로 모는 사냥꾼처럼 발을 떼었다.


쿵. 쿵.


일부러 과장한 장화 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셀라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낭패의 기색이 스쳤다.


‘말도 안 돼.’


등은 이미 차가운 벽에 닿았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남자는 조소 섞인 얼굴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착각하지 마라. 넌 네 가치를 너무 과대평가했어. ‘황금 주판’이라는 별명이 울겠군.”

“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손이 뱀처럼 튀어 나갔다.

억센 손아귀가 셀라의 가녀린 목을 단숨에 틀어쥐었다.


쾅.


벽에 머리가 쾅 부딪쳤다.

빠져나갈 틈조차 없는 완벽한 제압이었다.


“끄윽…!”


차갑고 거친 손가락이 기도를 파고들었다.

숨이 막히며 공기가 목 앞에서 헛돌았다.


시야가 하얗게 번쩍이며 점멸했다.

귀 안쪽에서 웅, 하는 소리가 울렸다.

손끝이 저릿저릿하게 마비되어 갔다.


생애 처음으로, 죽음이 살갗이 닿았다.


하지만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셀라의 이성은 비명을 지르며 돌아가고 있었다.


‘수를 찾아야 해. 이자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지?’


본능적인 공포 한가운데서도 셀라의 시선은 남자의 얼굴을 훑었다.


남자의 입은 광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눈동자 깊은 곳에는 다른 것이 깔려 있었다.


단순한 살의가 아니었다.

자기 등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향한 공포.


질릴 정도로 잘 알고 있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

셀라는 그 낯선 공포의 방향을, 필사적으로 쫓으려 했다.


“세상을 너무 좁게 보는군. 내 주군은 고작 아르젠트 따위와 비교될 분이 아니야.”

“컥… 끄으…”


강철 같은 악력이 기도를 짓이겼다.

이 막히고 사고가 뚝, 뚝 끊어지는 것 같았다.


셀라는 본능적으로 발버둥 치며 남자의 팔을 긁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네가 믿는 그 가문의 이름값이 여기서도 통할 것 같나? 지금 당장 내가 널 엉망진창으로 망가뜨려도 그분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거다.”


남자의 다른 손이 셀라의 옷깃을 거칠게 파고들었다.

찌익, 고운 천이 찢어졌다.

서늘한 수도원의 공기가 맨살에 닿았다.


남자의 눈에서 흉포한 욕망이 번쩍였다.

단순한 살의가 아니었다.


고귀한 것을 철저히 짓밟고 유린하려는 악의였다.


‘실패… 했나.’


낭패감이 죽음의 공포보다 먼저 밀려왔다.

시야 가장자리가 검게 타들어 갔다.

폐가 쪼그라들고, 심장이 미친 듯이 흉벽을 두드렸다.


그래도 셀라의 머리는 비명을 지르며 계산을 멈추지 않았다.


‘독단인가? 아니면… 명령인가?’


이것이 만약 의뢰주가 허락한 선이라면, 이미 그녀의 목숨값은 치러진 뒤라는 뜻이었다.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의식이 희미해졌다.


남자의 비릿한 웃음소리가 멀어져 갔다.


‘아니야.’


여기서 죽으면 자신의 삶은 그저 어린아이의 숫자놀음으로 끝날 뿐이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두 팔을 버둥거리며 끝까지 몸부림쳤다.


손끝의 감각이 사라져 가던 바로 그때, 날카로운 비명이 수도원의 적막을 찢었다.


“채석장이 당했다!”


우당탕거리는 소음.

내부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뭣이?”


그 한마디가 셀라를 살렸다.

당황한 남자의 아귀힘이 풀린 것이다.

셀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닥으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쿨럭, 컥… 커흑…”


기도가 열리자, 생명줄 같은 공기가 폐부로 들이닥쳤다.


얼굴 가득 눈물을 흘리며 기침을 쏟아내면서도 셀라는 눈을 감지 않았다.

오히려 독기 어린 시선으로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당혹, 그리고 공포.

천하를 쥔 듯 오만하던 얼굴이 사색으로 질려 있었다.


‘기회야.’


상인의 본능이 비명을 질렀다.


판이 뒤집혔다.

누군가 이 판을 통째로 엎었고, 그건 이 남자조차 예상치 못한 변수다.


역전의 빛이 보였다.

패배와 비탄에 잠식돼 있던 상인의 감각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네 고용주… 쿨럭, 짓이군.”

“뭐?”


남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틈이 보였다.


셀라는 부어오르기 시작한 목을 감싸 쥐고,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상대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쿨럭, 쿨럭…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 아이를 확보한 마당에, 헉… 너 같은 잔챙이를 그대로 둘까?”


셀라의 도박이었다.

하지만 확신이 있었다.


사흘 넘게 아무 짓도 안 하다가, 지금 이렇게 돌연 태도를 바꿔 위협한다면.


답은 뻔했다.

붉은 머리의 소녀.

그 아이가, 이들이 진짜로 노리는 목표였다.


셀라는 그 판단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빌어먹을!”


남자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터져 나왔다.

흔들리는 동공, 떨리는 입가.


그 욕설은 셀라에게 성화의 찬송가보다 더 달콤하게 들렸다.


때가 온 것이었다.

상인으로서, 반격을 시작할 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