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의 전쟁론> 1부 3장 | 제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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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먼드와 별동대는 수도원 외벽 아래, 가장 짙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능선 위에는 터너와 데니스가 에드먼드의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아직… 멀었나요?”
루벤이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활을 움켜쥐었다.
에드먼드는 잔뜩 굳어 있는 청년에게 피식 웃어 보이며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기다려. 배달부는 반드시 온다.”
태연한 척했지만, 에드먼드 역시 속으로는 타들어 가고 있었다.
‘오다가 쓰러져 죽지 않아야 했을 텐데.’
이대로 소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사상자를 각오하고 수도원을 정면으로 두드려야 할지도 모른다.
시간도 없었다.
곧 동이 틀 터였다.
어둠이라는 가장 강력한 아군이 사라지기 전에 승부를 봐야 했다.
초조함이 목을 조여오던 바로 그때였다.
고요하던 수도원의 공기가 일순간 뒤틀렸다.
“……!!”
우당탕!
무언가가 거칠게 넘어지는 소리.
이어서 경악에 찬 고함이 수도원의 적막을 찢어발겼다.
“채석장이 당했다!”
에드먼드가 기다리던 바로 그 ‘신호’였다.
“왔다.”
가레스가 묵직한 방패를 주먹으로 쿵, 내려쳤다.
그 둔탁한 진동이 결단의 신호였다.
전술가로서의 계산은 모두 끝났다.
이제부터는 피의 복수를 집행하는 사령관의 시간이었다.
스릉.
에드먼드가 허리춤에서 롱소드를 뽑아 들었다.
섬뜩할 정도로 맑은 금속성이 밤공기를 갈랐다.
그 소리에 숨죽이고 있던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지휘관의 등 뒤로 꽂혔다.
에드먼드는 눈을 감고 짧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놈들의 비명.
당황한 발소리.
흔들리는 횃불.
모든 박자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셋, 둘, 하나.
마지막 숫자가 사라지는 순간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안에는 냉철한 이성 대신 뜨거운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모두, 불타버린 마을을 떠올려라.”
잔인하게 도륙된 마을 사람들.
불타버린 그들의 터전.
초토화된 마을.
그리고 죽음마저 갈라놓지 못한 아이와 어미의 손.
“잊지 마라. 그들의 죽음을!”
에드먼드는 폐가 찢어질 듯 강하게 외쳤다.
그 울림은 코르반 병사들의 심장을 거칠게 두드렸다.
에드먼드가 치켜든 롱소드의 검신이 고개를 내민 달빛에 부서졌다.
그는 검을 그대로 앞으로 찌르며 명령을 내렸다.
“전군, 돌격!”
“와아아아!!”
함성과 함께 능선 위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불꽃이 한꺼번에 피어올랐다.
터너와 데니스가 준비한 교란용 횃불이었다.
갑작스럽게 산을 뒤덮은 불길은 마치 수백수천의 군세가 포위한 듯한 압박과 공포를 안겼다.
“저, 적이다! 산 위에도 있다!”
“포위됐다!”
혼비백산한 적들을 향해 에드먼드와 가레스, 아르나바즈가 선두에 서서 맹렬하게 쏟아져 들어갔다.
그 뒤를 코르반 병사들이 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더 이상 도적에 대한 공포는 없었다.
어제 보았던 참극에 대한 강렬한 복수심만이 그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적이다! 기습이다!”
“막아! 무기 들어!”
우왕좌왕하며 무기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한 적들에게, 코르반의 병력은 성난 파도가 되어 덮쳤다.
은밀함은 끝났다.
이제는 살육의 시간이었다.
“죽어라! 이 개새끼들아!”
“커억……”
함성이 밤하늘을 메웠다.
절규와 고함.
욕설과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
그 모든 것이 뒤엉켜, 지옥을 만들었다.
‘혼란’이라는 아군을 등에 업은 코르반 병사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들은 기사도가 뭔지 따질 틈 따위 없었다.
급소를 노릴 여유가 없으면 다리를 찍고, 팔을 물어뜯고, 눈을 찔렀다.
가레스에게 받은 지옥 훈련의 성과였다.
수적 우위를 점한 곳만 골라, 집요하게 적들을 찢어발겼다.
그 난전의 한복판에 인간 흉기가 날뛰고 있었다.
“비켜라, 피라미들아!”
가레스의 육중한 발차기가 적병의 복부를 강타했다.
병사가 억, 하는 소리를 내며 나가떨어지자마자 가레스의 거대한 방패가 허공을 갈랐다.
콰직.
방패의 철 테가 적의 두개골을 짓눌렀다.
끔찍한 소리가 났지만 가레스는 멈추지 않았다.
쓰러지는 적이 놓친 손도끼를 낚아채, 맞은편에서 달려드는 또 다른 적의 얼굴을 향해 내던졌다.
퍽.
도끼는 정확히 미간에 박혔다.
피를 뒤집어쓴 가레스의 형상은 지옥의 문지기를 떠올리게 했다.
그가 피 묻은 전투화를 바닥에 쿵, 내디디며 포효했다.
“자신 있는 놈은 다 덤벼라! 나, 가레스 발로르가 상대해 주마!”
“이, 이런 괴물 같은……!”
적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가레스의 압도적인 무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전의를 꺾은 결정적인 한마디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대장! 대장이 없어!”
“빌어먹을, 공녀를 데리고 도망쳤다!”
그 한마디에 그들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애초에 그들 내부의 결속력은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
이미 승패는 기울고 있었다.
전장의 다른 한편에서는 아르나바즈가 춤을 추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춤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잔혹한 살육극이었다.
쉭, 쉬익.
달빛을 받아 번뜩이는 쌍곡도가 허공에 은빛 궤적을 그렸다.
아름답기까지 한 몸놀림이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그녀가 스쳐 지나간 자리마다 목과 가슴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커헉…”
철저하게 급소만 노리는, 숙련된 학살자의 솜씨였다.
평소라면 감정 없는 기계처럼 숨통만 끊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밤은 달랐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오늘 보았던 잿더미가 된 마을의 불씨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칼날은 평소보다 훨씬 거칠고 집요했다.
단순히 베는 데 그치지 않고, 뼈와 살을 비틀어 가며 적들을 쓰러뜨렸다.
말 없는 분노가 검끝에서 폭발하고 있었다.
항상 자신이 내지르는 검격에 의미를 구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묻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그녀의 세포 하나하나를 더욱 격렬하게 날뛰게 했다.
“윽!”
에드먼드는 끈질기게 매달리는 적병을 어깨로 밀쳐낸 뒤, 품에서 단검을 뽑아 놈의 목덜미를 그었다.
“커억…”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시체를 발로 차며 떼어 내고, 그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런 육탄전은 확실히 가레스나 아르나바즈의 영역이었지, 그의 전공이 아니었다.
칼은 덤이었다.
그의 무기는 언제나 머리였다.
에드먼드는 흔들리는 시야를 다잡았다.
눈앞의 적 하나를 죽이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체크메이트였다.
‘우두머리… 놈을 잡아야 해.’
놈들은 규율이 잡힌 집단이다.
머리를 치지 않으면 잔당들이 끝까지 저항하거나, 가장 중요한 ‘목표물’을 데리고 도주할 것이다.
에드먼드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수도원 2층을 향했다.
외부와 이어진 가파른 돌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다.’
인질은 가장 깊고 안전한 곳에 두기 마련이다.
2층, 혹은 가장 아래.
에드먼드는 피 묻은 롱소드를 고쳐 쥐고, 터질 듯한 허벅지에 힘을 주어 돌계단을 향해 내달렸다.
마침내 2층 층계참에 닿았을 때였다.
복도 끝,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튀어나왔다.
덥수룩한 수염과 광기 어린 눈빛을 한 사내.
그의 손에는 백금발의 소녀가 짐짝처럼 팔을 잡힌 채 질질 끌려 나오고 있었다.
“… 이미 끝났어! 도망쳐.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야. 날 데려가 봤자 짐만 될 뿐이야!”
“닥치고 따라와!”
소녀는 끌려가면서도 악을 쓰며 사내의 팔과 얼굴을 마구 긁어 댔다.
단순한 발버둥이 아니었다.
틈만 보이면 사내를 자극해, 판단을 흐리고 단 1초라도 더 시간을 벌려는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이미 공포에 질린 사내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는 그저 누군가에게서 소중한 인질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짓만 반복하고 있었다.
휘청하며 소녀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던 찰나, 그녀의 시선이 복도 반대편에 서 있는 에드먼드와 허공에서 마주쳤다.
“……!”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독기로 가득 차 있던 소녀의 눈동자가 피 칠갑을 한 낯선 남자를 발견하고 찰나 동안 흔들렸다.
구원자인가, 아니면 또 다른 적일까.
마치 ‘당신은 누구죠?’라고 묻는 듯한 소녀의 눈빛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사내의 손에 이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저놈이다.’
그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저자가 이곳의 우두머리다.
에드먼드는 백금색 잔영이 가신 어둠을 향해 망설임 없이 바닥을 박찼다.
“이봐, 에드먼드! 어딨나!”
수도원 앞 정원. 가레스의 우렁찬 고함이 메아리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전투는 끝났다.
바닥에 나뒹구는 적의 시체만 어림잡아 서른 구.
놀랍게도 그중에 코르반의 병사는 단 한 명도 섞여 있지 않았다.
에드먼드의 설계가 만들어낸, 말도 안 되는 기적이었다.
가레스는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르나바즈가 하얀 털옷을 붉게 물들인 채, 쌍곡도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고 있었다.
격렬했던 살육 탓인지 그녀의 숨도 조금 거칠어져 있었다.
“누가 에드먼드를 못 봤나?”
가레스의 물음에 구석진 돌벽 아래 쪼그려 앉아 있던 루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2층… 2층으로…”
청년의 손에 들린 활은 깨끗했다.
시위 한 번 당겨보지 못한 것이다.
불타는 마을을 보며 복수를 다짐했지만, 막상 닥쳐온 전장의 공포는 여린 청년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루벤은 자괴감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빌어먹을. 그 녀석은 도대체가!”
가레스는 말을 끝까지 잇지 않았다.
부대의 지휘관인 주제에 전령도, 전투도, 척후도 도맡아 하려 드는 성정.
자그마한 병력을 운용할 때는 든든한 장점이었다.
언제나 맨 앞에서 몸으로 보여 주는 지휘관.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군대는 한 사람이 모든 걸 떠안고 싸울 수 없는 집단이다.
그래서 역할이 나뉘고, 지휘관이 따로 있는 법이다.
전설 속 이야기처럼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는 영웅 따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언젠가 저 성정이 그를 쓰러뜨릴지도 모른다.
가레스는 그 예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채 이를 꽉 깨물었다.
그가 불안한 예감에 인상을 찌푸리던 찰나, 하얀 그림자가 곁을 스쳐 지나갔다.
아르나바즈였다.
그녀를 말리듯 가레스의 목소리가 튀었다.
“이봐! 혼자 들어가는 건 위험해!”
“덩치, 당신은 병사들을 돌봐. 나는 에드의 뒤를 쫓아갈 테니까.”
대꾸할 틈도 없이 2층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는 아르나바즈.
그 다급한 뒷모습을 보며 가레스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에드? 허, 참 나. 언제부터 애칭으로 부르게 된 거냐.”
투덜거림이 새어 나왔지만, 그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람을 미치도록 끌어당기는 힘.
가레스는 짧게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 놈.”
영웅이 되길 그토록 싫어하는 주제에, 정작 영웅의 자질은 누구보다 완벽하게 타고난 자.
하늘이 내린 가장 짓궂은 농담이, 바로 저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