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일격

<설계자의 전쟁론> 1부 3장 | 제30화

by 밍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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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의 전쟁론>

1부. 광휘재림(光輝再臨)

3장. 작은 불꽃들

30화. 고요한 일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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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Youtube_BrunuhVille 취향에 따라 들어주세요 :)


시야가 뿌옇게 무너졌다.

화마가 토해낸 연기가 지하까지 밀려들었다.


지하 통로는 성인 남자 둘이 어깨를 맞대고 지나가기 힘들 만큼 비좁았다.

낮게 내려앉은 천장이 뜨거워진 공기를 가두어 둔 탓에, 통로 안은 마치 거대한 화로 내부처럼 후끈거렸다.


들이켜는 순간 목구멍이 따끔하게 긁혔다.

회색 연기는 바닥을 기듯 낮게 깔려오다 에드먼드의 무릎을 감싸고 돌더니, 이내 가슴팍까지 차올라 숨구멍을 틀어쥐었다.


눈이 시렸다.

눈물이 저절로 배어 나왔다.


“쿨럭, 쿨럭.”


에드먼드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멀어져 가는 발소리에 집중했다.


왼쪽 허벅지가 유난히 뜨거웠다.

난전 중에 베인 상처가 생각보다 깊었다.

피가 장화 속으로 흘러들어 발가락 사이가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치밀었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손등에 핏줄이 돋을 정도로 검자루를 꽉 쥐고 어둠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후우…”


매복은 없었다.

허나 안심할 순 없었다.

지금은 변수를 계산할 시간조차 사치였다.


그는 발소리를 죽인 채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였다.


“이거 놔! 놓으란 말야!”

“젠장, 닥치고 가만히 있어!”


짜악!

살이 맞부딪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여자의 비명이 뚝 끊겼다.


찾았다.

에드먼드는 어렴풋이 움직이는 그림자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둠 속에서 세 개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남자 하나, 여자 둘.

그중 한 사람의 머리칼이 어둠 속에서도 백금색으로 희미하게 빛났다.

아까 2층 복도에서 마주쳤던 그 소녀였다.


남자는 그녀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반대쪽 옆구리에는 작은 체구의 아이를 끼고, 에드먼드가 숨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에드먼드의 시선이 등 뒤의 낡은 쪽문에 닿았다.

밖으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

놈의 발걸음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의 모습이 뚜렷해졌다.

백금발의 소녀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반면 옆구리에 끼인 붉은 머리 소녀는 의식을 잃은 채 인형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놈의 발걸음은 난폭하고도 초조했다.

탈출구가 눈앞이라 긴장이 풀린 탓인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사신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숨소리조차 지웠다.

짧은 호흡.


깊게 일격을 날렸다.

검끝은 적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카앙!

검 끝이 부드러운 살점을 파고드는 감각 대신, 단단한 철에 부딪힌 듯한 서늘한 진동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둔탁한 금속성이 지하실을 울렸다.

놈은 옷 안에 갑옷을 껴입고 있었던 것이다.


“윽?!”


기습을 당한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 찰나의 순간, 에드먼드의 머릿속에 수많은 선택지가 번개처럼 스쳤다.


‘아직 기회는 있다.’


에드먼드는 지체하지 않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흡!”


두 번째 참격이 남자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그러나 남자는 본능적으로 상체를 뒤로 젖혀 칼날을 피했다.


거리가 벌어졌다.

놈은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왼손에 잡고 있던 백금발의 소녀를 짐짝처럼 에드먼드에게 집어 던졌다.


“꺄아악!”


검을 내질러 놈의 심장을 꿰뚫을 것인가, 아니면 소녀를 받을 것인가.

이성적인 계산을 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에드먼드의 손은 이미 바닥을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다.



“이런!”


가속도가 붙은 충격은 고스란히 에드먼드의 만신창이가 된 상체로 쏟아졌다.

충격과 함께 두 사람은 거친 돌바닥 위를 꼴사납게 굴렀다.


숨 돌릴 틈도 없었다.

에드먼드가 소녀를 옆으로 밀치자마자, 옆구리에 시뻘건 인두로 지지는 듯한 격통이 꽂혔다.


“큭!”


옆구리에는 단검이 꽂혀 있었다.

두꺼운 가죽 튜닉이 칼날을 잡아 주어 내장까지 닿지는 않았지만, 날카로운 쇠붙이는 이미 살을 깊게 파고들어 있었다.


‘검으로는 못 이긴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옆구리는 뚫렸다.

애초에 상처가 없었다 한들 기본기가 다른 상대였다.


정교한 검술로 맞붙으면 반드시 패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놈이 무기를 휘두를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


에드먼드는 옆구리에 박힌 단검을 거칠게 뽑아 던졌다.

피가 터져 나오는 고통을 악물어 삼키며 그대로 남자의 품으로 쇄도했다.


“이 미친놈이!”


쿵.


자세를 낮춘 돌격에 남자가 중심을 잃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 충격으로 놈의 옆구리에 끼어 있던 붉은 머리 소녀가 바닥으로 튕겨 나갔다.


“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백금발의 소녀가 아이를 낚아채며 뒷걸음질 쳤다.

두 남자가 짐승처럼 뒤엉켜 바닥을 구르는 순간, 위층에서 쏟아진 시커먼 연기가 파도처럼 밀려와 지하실을 집어삼켰다.


“콜록, 콜록…”

“도망쳐! 위로 가면 아군이 있다!”


에드먼드의 외침에 소녀가 멈칫했다.

공포에 질린 와중에도 그녀의 눈동자에 냉정한 의구심이 비쳤다.


“아… 아르젠트의 군대야?”

“설명할 시간 없다, 빨리!”


에드먼드의 절박한 고함에 소녀의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일단 살아야 했다.

소녀가 이를 악물고 늘어진 붉은 머리의 소녀를 부축해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남자가 악을 쓰며 손을 뻗었다.


“젠장, 놓칠까보다!”


놈의 손끝이 소녀의 치맛자락을 스쳤다.

하지만 그 이상 뻗지 못했다.

에드먼드가 뒤에서 놈의 허리를 쇳덩이처럼 끌어안고 늘어졌기 때문이다.


“이거 안 놔? 이 새끼가…!”


퍽.

우두머리의 팔꿈치가 에드먼드의 등과 옆구리를 사정없이 찍어 내렸다.


“크윽!”


하필이면 아까 찔린 상처 부위였다.

꿰뚫린 살이 짓이겨지고, 봉합되지 않은 상처가 벌어지며 꿀럭거리는 핏물이 터져 나왔다.

생살을 지지는 듯한 고통이 튀어 올랐다.


팔에서는 힘이 빠져나갔다.

에드먼드는 비명을 삼켰다.


‘버티면 이긴다.’


그가 한 호흡을 버티면 승리는 한 발짝 더 다가온다.

가레스든 아르나바즈든, 누군가 도착할 때까지만 물고 늘어지면 되었다.


“죽어! 죽으라고!”


퍽! 퍽!


남자의 주먹이 내리꽂혔다.

에드먼드의 시야가 점멸했다.


튜닉은 이미 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기어코 놈의 다리를 걸어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쿠당탕!


두 남자는 뒤엉켜 바닥을 굴렀다.

짙어진 연기 탓에 위아래조차 구분되지 않는 혼돈의 소용돌이.

들리는 것은 거친 숨소리와 살이 터지는 타격음뿐이었다.


“침착해. 침착해… 셀라… 흑.”


셀라는 붉은 머리 소녀를 부서져라 끌어안은 채, 주문을 걸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턱끝은 제멋대로 떨리고 있었다.


이성은 끊임없이 도망치라고 비명을 질렀다.

잿빛 머리칼의 남자가 목숨 걸고 시간을 벌어 주는 지금이 유일한 탈출 기회였다.


눈에 빤히 보이는 손익계산서.

그런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대신해 칼에 찔리고, 바닥을 구르는 저 남자를 버리고 혼자 도망친다?

공녀로서 자존심, 아니,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가야 해… 하지만…”


난간을 잡은 셀라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어린 그녀가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가혹한 선택의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연기 너머에서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성급하지도, 망설이지도 않는 일정한 박자.


무너져가는 지하 통로에 기묘한 정적을 불러일으키는 이질감.

서늘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비켜.”


경고라기보다 선언에 가까운 목소리.

셀라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매캐한 회색 구름을 찢고 장신의 그림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피 칠갑이 된 하얀 털옷, 양손에 들린 서슬 퍼런 쌍곡도(雙曲刀).

흡사 지옥 불 속에서 걸어 나온 사신 같았다.


“아르나바즈!”


에드먼드가 반색하며 외쳤다.

반면 에드먼드와 엉켜 있던 남자의 입에서는 경악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싸우는 철학가?! 네가 왜 여기에!”


남자는 아르나바즈를 알고 있었다.

놈은 에드먼드가 모르는 그녀의 이명까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젠장, 비켜! 거머리 새끼가!”


공포에 질린 남자가 발광하듯 몸부림쳤다.

다급해진 그는 에드먼드의 숨통을 끊기 위해 주먹과 무릎을 닥치는 대로 휘둘렀다.


지하실은 순식간에 더 짙어진 연기로 뒤덮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피아 식별조차 불가능한 혼돈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에드먼드는 떨어져 나가는 정신을 붙잡고 악을 쓰듯 소리쳤다.


“아르나바즈! 그냥 찔러!”

“미친놈, 같이 죽을 셈이냐!”


남자가 기겁하며 발버둥 쳤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쇳덩이처럼 굳은 팔로 남자를 옥죄었다.


이대로 놈을 놓치면, 불타버린 마을의 비극이 또다시 반복된다.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지금 그의 옆에서 떨고 있는 백금과 불꽃의 소녀 둘.


흐려져 가는 시야 속에서, 에드먼드는 마지막 힘을 짜내 다시 한번 소리쳤다.


“아르나바즈—!!!”


처절한 비명이 지하를 울렸다.

그림자 속에 서 있는 아르나바즈의 얼굴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 전쟁이란 결국, 누군가의 광기를 온전히 믿고 따르는 싸움일지도 모른다.


찰나가 억겁으로 바뀌는 순간, 아르나바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마침내 검의 의미를 찾아낸 사람처럼.


그리고 보이지 않는 허공을 일섬(一閃)했다.


푸욱.


소름 끼치는 파열음.

칼날은 어둠 속에서도 정확히 남자의 목만을 깨끗하게 관통했다.


“커헉…”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했다.

남자의 몸이 축 늘어지며, 뜨거운 피가 에드먼드의 얼굴로 쏟아졌다.


상황 종료였다.

에드먼드는 멍한 눈으로 코앞에서 숨이 끊어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검날 한 개 차이.

조금만 빗나갔어도 자신의 목이 꿰뚫렸을 거리였다.


“…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


칠흑 같은 연기 속에서 어떻게 적만 골라 베었는지 묻는 말이었다.

아르나바즈는 칼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대 같은 성능 좋은 난로를 내가 모를 리 없잖아. 그래서 그대보다 차가운 놈을 찔렀지.”

“아하핫!”


에드먼드의 입에서 폭소가 터졌다.


아마 그녀는 그의 숨소리와 기척을 골라 피했을 것이다.

초인적인 감각이 만들어 낸 기적.


그런데도 굳이 ‘난로’에 비유하는 저 뻔뻔함이라니.

전장의 용병다운 농담이었다.


긴장이 풀리자 참았던 고통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컥, 큭… 쿨럭.”


에드먼드가 피 섞인 기침을 토하며 뒤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농담은 나중에 해. 일단 나가자.”


아르나바즈가 재빨리 에드먼드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러고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서 있는 셀라를 향해 짧게 소리쳤다.


“어서!”

“예, 옛!”



셀라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붉은 머리 소녀를 끌어안고 두 사람의 뒤를 허둥지둥 쫓았다.


방금 목격한, 믿기지 않는 광경.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이루어진 ‘절대적인 신뢰’의 잔상이 그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