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림 Oct 22. 2023

우울과 불안에서 살아남는 방법 2: 운동/몸 움직이기

#19 <제가 우울증이라고요? 어쩐지...>

운동이 우울증에 끼치는 영향

우울증이 심했을 때의 나는 하루종일 누워서 핸드폰만 봤다. 그때 정신과에 가면 선생님이 꼭 물어보는 질문이 “요즘 운동은 하세요?”였다. 몸에 아무런 힘이 없건만 그는 항상 운동을 처방했다. 산책이라도 좋으니 꼭 몸을 움직이라고 했다. 지금 망가진 몸의 교감 신경계와 부교감 신경계의 균형을 되찾아줄 것이라고 했다. 뇌 과학과 관련된 책에서도 몸을 움직이면 기분이 좋아지는 호르몬이 나온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평생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학교 체육시간에도 기회만 되면 앉아있으려고 했고, 스트레칭이라는 것을 자발적으로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운동은 재미도 없었고 땀이 나는 게 너무 싫었다. 성인이 된 이후 헬스 PT도 한 번 받아봤었다. 초절식을 해서 살이 빠지기는 했다. 하지만 너무도 어지러워서 운동을 하는 시간 외에는 계속 누워있거나 잠을 잤다. 사람들이 운동을 왜 하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돈을 쓰지 않으면 도저히 자발적으로 운동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등록한 필라테스가 시작이었다. 이후 요가, 러닝, 홈트레이닝, 클라이밍을 거쳐 지금은 그날 기분에 따라 맞는 운동을 하고 있다. 스트레스를 털어버리고 싶을 때는 러닝이나 클라이밍을 하고,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싶을 때에는 요가를 하는 식이다. 운동을 며칠 안 하면 찌뿌둥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되었다.


운동이 삶의 루틴이 되는 데에는 운동을 대단한 무언가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어떤 강도이든 하루에 30분에서 한 시간은 몸을 움직이는 시간으로 갖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어떤 날에는 고강도 근력운동을 했고, 어떤 날에는 가볍게 스트레칭만을 했다. 하루종일 앉아서 일을 하다 보니 몸을 움직이면 개운하고 기분 전환이 되었다. 운동이 주는 보상이 분명하다 보니 강제성이 없어도 운동을 찾게 되었다.


운동을 하며 무엇보다 좋은 점은 현재에 집중하는 연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울증을 앓다 보면 종종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에 휩쓸리게 된다. 불안을 줄이기 위해서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에 머물러야 한다. 이때 운동은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운동을 하면 근육을 쓰는 느낌을 알아차리려 노력하게 된다. 신체의 감각에 집중하다 보면 잡념이 들어올 틈이 없다. 낮에 일에서 했던 실수나 신경 쓰이는 상사의 말도 잊게 되고, 불투명한 구직 상황에 대한 불안감도 사라진다. 정신과 선생님은 이것을 ‘생각을 한 번 끊어주는 것’으로 표현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불안과 스트레스의 흐름을 끊고 무언가에 몰입을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운동은 건강한 통제감을 느끼게 해 준다. 불안을 줄이기 위해서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나의 통제 밖의 일도 분명해져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가 적어진다. 스트레스받는 상황은 나의 통제를 벗어난 일이지만, 운동을 하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운동이 끝나고 나면 혈액 순환이 되며 개운함과 후련함이 느껴진다. 이는 내가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을 가져다준다. 우울감에 끌려가지 않고 내가 스스로 나의 기분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그러다 보면 우울감과 불안감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그런 감정들의 영향을 덜 받게 된다. 점차 운동 수행 능력이 늘어가며 생기는 성취감과 자신감은 덤이다. 체력이 좋아지니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고 그럼으로써 또 다른 성취감을 느끼는 선순환도 경험할 수 있다.


사람은 일상에 ‘꼭 해야 되는 일’ 외에도 ‘꼭 잘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는 성취로 평가받는 삶에 숨이 트이게 해 준다. 생업이 힘들어도 그런 요소들이 삶에 많을수록 사람은 버틸 수 있다고 한다. 운동은 내가 돈을 받고 하거나 평가받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꼭 잘할 필요도 없다. 잘 못해도 괜찮으며, 결과보다 과정으로도 충분하고, 작은 성취도 중요한 것. 자신에게 높은 잣대를 들이대는 완벽주의자에게는 더욱 필요한 경험이다.


클라이밍에서 삶의 용기를 얻다

운동을 하다 보면 다른 데서는 배울 수 없는 진리들을 깨우치게 되기도 한다. 최근 나는 클라이밍을 주 2~3회씩 하고 있다. 같은 색의 돌만을 사용하며 최적의 경로와 방법을 찾아 문제를 푸는 볼더링 종목을 한다. 그 과정에서 인생의 태도도 학습하고 있다. 그중 가장 뼈저리게 배운 점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 법이다. 클라이밍장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사람마다 풀고 있는 문제의 난이도가 다르고 유형도 다르다. 사람마다 가진 조건도 다르다. 어떤 사람은 키가 크고 어떤 사람은 유연하다. 그래서 잘하는 문제도 느는 속도도 다르다. 역시 불공평한 세상이다. 처음에는 클라이밍을 할 때 나보다 잘하는 사람에게 질투가 났다. 나보다 클라이밍을 늦게 시작했는데 키와 힘으로 더 높은 난이도를 푸는 친구들을 보면 열등감이 생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깨달았다. 사람마다 그저 자신 눈앞에 놓인 문제에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것을. 높은 난이도를 푸는 사람, 나보다 조건이 좋은 사람은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보내주려고 한다. 어차피 그들의 조건과 상황은 나와 다른 것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대신 내가 풀 수 있는 나의 문제에 집중을 했다.

클라이밍장의 좋은 문화는 다른 사람이 성공을 하면 “나이스!”를 외치고 박수를 치며 그의 성공을 함께 축하해 주는 것이다. 처음에는 남들이 하니까 나도 기계적으로 따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진심으로 그들의 성공에 기뻐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순간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남의 성공을 나의 열등감에 비추어보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축하해 줄 수 있게 되었다. 삶은 이뤄야 할 목표의 연속이고 매 순간 경쟁을 하고 있다는 입시 시절의 마인드가 바뀌고 있었다.


두 번째로는 안 되면 되는 일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는 아무리 시도해도 안 된다. 처음부터 자세를 못 잡겠어서 시작할 엄두를 못 내겠는 문제도 있다. 이전에는 그런 문제에 집착을 했다. 남들은 쉽게 해내는 문제를 못해낸다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하지만 어떤 문제는 내가 아직 근력이 없어서 못하고, 어떤 문제는 아직 문제풀이에 사용되는 스킬을 배운 적이 없어서 못 풀기도 한다. 그럴 때에 거기에만 계속 매달리면 힘은 힘대로 소진하고 마음도 지치게 된다. 이제는 그럴 때 다른 문제로 먼저 시선을 돌린다. 그러다 보면 어떤 문제는 조금 난이도가 높아도 ‘몇 번 더 하면 되겠다’라는 감이 온다. 그런 문제들은 몇 번 더 해서 악착같이 해낸다. 그러면 거기서 오는 성취감이 어마어마하다. 그날 치 클라이밍의 희열을 느낄 수 있다. 그 적당한 난이도의 문제를 솎아내는 과정이 있었기에 더욱 의미 있게 느껴진다. 그럴 때면 현재의 나에게 잘 맞는 난이도와 유형의 문제는 따로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실은 계속 고민하던 진로 탐색에 있어서 ‘이 직업이 아니면 안 돼’, ‘이 회사가 아니면 안 돼’, ‘나는 회사 밖을 나가면 살아남을 수 없어’와 같이 특정 선택지를 고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던 나의 믿음에 균열을 냈다. 아직 잘 맞는 무언가를 찾지 못했을 수도 있고, 다른 길을 택해도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는 생각의 유연함을 가져다주었다.


마지막으로는 도전에 대한 용기이다. 사실 나는 최근까지도 내 현재 수준보다 높은 난이도에 도전하는 게 두려웠다. 실패하면 남들 눈에 바보처럼 보일 것 같아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다. 조금 쉬워도 내가 풀 수 있는 것을 아는 문제들만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클라이밍이 예전만큼 재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어려운 문제로 자신을 떠밀어봤다. 역시 도전하는 처음이 가장 힘들었다. 손으로 잡는 홀드의 감각이 낯설고, 어떻게 잡아야 할지 어색하고, 어떤 방법으로 올라가야 하는지 모르겠었다. 그래서 완등을 못 하고 떨어졌다.

그런데 떨어지는 것은 아쉽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크게 다치지도 않았다. 나는 매번 떨어질 때마다 새로 배웠다. 다음에는 어떻게 해볼지를 생각했다. 그렇게 몇 번 같은 루트에 도전해 보면 감이 생겼다. 전에 어려웠던 곳까지도 거침없이 올라갈 수 있었다. 그래도 또 새로운 것에 막히고 계속 떨어지지만 괜찮았다.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면 종점에 다다르기도 했다. 물론 그러다가 안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사실 안 되는 문제인 것을 아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왜 안 되고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작 자세를 모르겠으면 누군가에게 물어보면 되고, 힘이 안 된다면 아쉽지만 나중을 기약하면 되는 일이었다.

직접 도전해보지 않으면 그 미지의 영역은 계속 두렵고 어렵다. 하지만 도전을 하게 되면 그 불확실성은 더 이상 단단하지 않다. 나와 그 문제의 상호작용 끝에 어떤 방식으로든 분명하게 정의된다. 그렇게 불안의 장막은 걷힌다. 그 경험은 나의 것이 된다. 그때 배운 점을 기반으로 다음에는 어떤 문제를 또 풀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려워 보이는 새로운 문제에 도전하는 것이 역시 쉽지는 않다. 결과는 완등을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도전하면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도전해봐야지만 어느 문제가 나에게 적합한지를 알 수 있다.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 봐야지만 새로운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던 날, 나는 인생에서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었다. 그 선택을 두고 잘한 것인지 못 한 것인지에 대한 불안이 올라왔다. 하지만 클라이밍을 하면서 느꼈다. 최소한 의미 없는 경험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처음엔 당연히 어렵겠지만 점차 나아질 것이고, 그럼에도 안 된다면 여기서 너무 승부수를 보려고 할 필요도 없었다.


그날 클라이밍장에서 완등을 하지 못하고 중간에 떨어지는 일행에게 한 사람이 “와 용기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쉽다’나 ‘거의 다 왔는데’라고 실패를 암시하는 반응보다 훨씬 긍정적으로 느껴졌다. 시도하는 첫 발을 뗀 것만으로도 이미 가장 큰 용기가 필요한 단계를 넘어온 것이다. 나는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시도해 보기로 했다. 분명 배우는 것이 있으리라 믿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