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정혜숙 시조집 『거긴 여기서 멀다』 (책만드는집, 2022)를 읽고
2003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해, 2012년 중앙시조대상 신인상과 올해 2022년 중앙시조대상을 받으며 삼관왕을 차지한 정혜숙 시조시인의 시조집이다.
첫 번째 시조집 『앵남리 삽화』에 이어, 유난히도 나를 끌어당기는 언어들로 가득했던 두 번째 시조집 『흰 그늘 아래』, 노래처럼 리듬감이 좋아서 자꾸만 읽게 되었던 세 번째 시조집 『그 말을 추려 읽다』의 좋은 기억으로 다시 만난 그의 네 번째 시조집 『거긴 여기서 멀다』는 기대감 가득 품고 내게로 왔다.
시조의 언어는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어가 아닌 편지글 속의 언어라고 해야 할까. 만져지지 않는 말들이 펼쳐져 있다. 그렇기에 말쑥하고 정갈한 언어들은 받고 싶은 편지이고 닿고 싶은 여행지다.
『거긴 여기서 멀다』는 제목처럼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지극히 그리운 이에게 띄우는 말들이다. 오래된 옛사람들이 사용했을 법한 낱말과 언어라서 다소 낯설기도 하지만, 그 말들이 깊은 정서를 담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공감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쉬이, 선택하지 못하는 결이 고운 정서를 담아내는 문장들로 채워진 책이다.
현대의 언어가 아닌 옛 선비들의 세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들로 빚어진 슬프고 정제된 옛 정서를 그리워하는 서정이 물씬 풍긴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의 편지다.
시인이 쓰는 글의 특징인 슬픈 어조, 정제된 감정, 막힘없는 리듬감은 이번 책에서도 만날 수 있다. 정감 있는 단어들은 앞의 책에서 읽었던 단어들이 등장해서 반갑기도 하다. 감정은 더욱 절제되어 예전 책들보다 조금은 단조롭다. 리듬도 조금은 덜하다. 저자가 쓴 책 여러 권의 독자로서 내가, 감각이 더 둔해졌을 수도 있고, 시인이 고도로 조절한 부분일 수도 있겠다.
“대체도 생은 미로 같고/ 모래언덕 바람 같다”(「다시, 접경이다」) 이런 심경의 시들이 대부분이다.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비슷한 정서들이 엿보인다. 그의 마음에 절절함이 가득 차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은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보던 책 내려놓고 조금 더 멀리 갔다
쉼표 같은 구름 몇 점, 안색 밝은 나무들
조용히 기척을 하는
보풀 같은 잎눈 꽃눈
5촉 전구의 밝기만큼 어둠이 비껴 앉고
세간의 묵은 그늘 시나브로 묽어지는
천지간 물오른 봄
당신, 조금 웃었다
_ 「당신, 조금 웃었다」 전문
책에서 고른 그나마 밝고 환한 내용인 것 같다. 평소의 정혜숙 시인은 찬찬하고 다정한 사람이다. 책으로 만나면 그늘이 짙고, 슬픔이 많은 글이지만 귀한 시집에서 ‘밝은 웃음이 연상’되는 내용을 찾은 것이 반가웠다.
물활론적 시어들이 그득한 시집이다. “꽃의 이마 쓰다듬는 봄의 미간”(「나비의 문장을 읽어요」), “심장이 더운 나무”(「시선을 먼 데 둔다」), “바람의 입술(「어둠이 발목을 적실 때」), ”옷섶 맑은 구름들“(「산자락 북향집」), 여름의 화음(「여전히 바람이 잦다」) 등 많은 시편에 어쩌면, 인간의 영역인 것들을 자연이나 다른 생명체에게 빌려주고 있다. 그래서 시들이 더욱 가깝게 읽히고 정서에 깊은 공감이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뒤란의 새소리 몇 닢 옮겨 적지 못한 채
하루를 탕진했다, 행간이 적막하다
어둠은 만상을 지우며
저잣거리 배회한다
손에 쥐면 바스러지는 문장은 가엾고
온기를 잃은 것들은 까무룩 멀어진다
저녁의 굽은 등 너머
글썽이는 어린 별
_ 「저녁의 굽은 등 너머」
매일 글을 쓰기로 한 것 같다. 다른 바쁜 일로 글쓰기를 하지 못한 날의 아쉬움을 시로 적은 것은 아닐까. 글쓰기에 집중하지 못한 글은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다. 어린 별은 화자가 아닐까. 그런 마음조차도 이렇게 의미 있는 글로 엮어내는 것이 시인의 글쓰기 능력이다.
하늘, 비, 구름, 별, 바람, 새, 꽃, 안개, 모래, 돌, 나무, 풀벌레 등 자연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진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다. 사유들이 사소한 인간관계에 얽힌 이야기보다는 자연에 대한 성찰과 자기 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로 깊게 확장되며 독자를 끌어들인다.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보내는 마음들이 적혔지만, 세상 만물이 보이지는 않아도 연결되어 있다는 사유를 펼치면 그의 편지가 손에 잡힐 듯하다. 그의 특별한 시들이 벌써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