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린 소설집 『여름의 빌라』 (문학동네, 2023) 중 「시간의 궤적」
백수린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여름의 빌라』는 사려 깊은 인물들이 지나온 “격정적인 한 장면”을 둘러싼 계절과 세월에 더해 집중 해서 함께 쫓아가 보는 일이 그의 소설을 읽는 주요한 독법이자 체험일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소설 속에서 아름다운 장면의 연결을 기억하고, 서사의 힘과 문장의 힘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읽기 목표가 주어졌다.
「시간의 궤적」은 그때는 미처 보지 못한 이면의 진실이 오랜 시차를 두고 당도하는 이야기이며 선명한 상실의 감정 앞에서 단절이 아닌 마주하는 용기를 택하는 소설 속 화자들에게 상실은 더 이상 상처가 되지 않는다.
“언니가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 부활절 방학이 시작되기 전의 어느 수요일이었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언니와 나는 프랑스 어학원에서 몇 달째 수업을 같이 듣고 있었다.
함께 술을 마시며 언니가 대기업 주재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언니와 나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들을 좋아하고, 비슷한 정치 성향을 가졌고, 30대 초중반의 나이에 새로운 삶을 꿈꾸며 프랑스에 건너와 살고 있다는 사실들이 벽을 허물게 했다.
“취향과 마음이 맞는 한국인 친구를 만나는 것은 취향과 마음이 맞는 외국인 친구를 만나는 일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깨달아 가던 차였다.” (p13)
그 후로 몇 주 동안 언니와 나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나와 언니의 연애사와 사소한 이야기까지 허물없이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외국 생활에서 외롭고 힘들었던 시간을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서로 힘이 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서울에서 해보지 않은 모든 것을 경험해 볼 생각이었고, 더 이상은 후회로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p18)
언니는 용감하고 반짝이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한다. 나는 원했던 대로 대학원에 입학했고, 대학원에서 프랑스인 브리스를 만난다. 첫 만남에서 데이트 신청 후, 브리스와 사귀게 된다. 살림을 합쳐 살던 그들은 석사 과정이 끝나가자 귀국할 시기가 되어 서로 예민해져서 다툼이 잦아졌다.
두 사람은 장거리 연애의 불안 때문에 결혼을 결심한다. 행정적인 절차를 위해 시청에서 결혼식을 올렸을 때 나의 증인 역할을 언니가 해주었다. 나는 결혼 후 불안했던 상황들이 해소되며 충만한 기쁨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해가 바뀌자 기쁨은 조금씩 사라졌고, 나는 내가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서 평생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서서히 자각하게 된다.” (p25)
나는 결혼해서 프랑스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으로 상황이 바뀌었는데, 언니는 체류 기간이 끝나면 귀국할 사람이라 필요한 정보도 대화 내용도 상반될 때가 많아지게 된다. 서로 상황이 바뀌면서 받아들이는 마음도 변해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프랑스인과 결혼한 여성과 주재원의 부인들에게 프랑스 요리와 생활 등 프랑스 문화에 대해 배우는 클래스에서 언니를 남자나 밝히는 여자로 험담하는 말을 듣는다. “그 사람 그런 사람 아니다”라고 말하고 나와 더 이상 그 모임에 나가지 않는다.
언니는 귀국 준비로 바빠졌다. 브리스와 셋이서 마지막 여행을 간다. 브리스와의 관계가 소원해서 브리스를 두고 여행을 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느 카페에서 언니와 브리스는 연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둘만 아는 이야기를 나눠서 나를 서운하게 만든다.
브리스가 한국 음식만 먹게 되었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나는 브리스가 나를 이해해 주기를 바랐고, 언니는 조목조목 브리스를 다독였고, 나는 브리스가 질린 것이 한국 음식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때는 언니가 내 남편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는 듯이 말하는 게 싫었고,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p34)
위로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양면적인 생각이 드는 주인공의 마음에 공감이 갔다. 부부의 소원한 문제를 언니는 아이를 낳으면 나아질지도 모른다고 조언했지만, 나는 그런 이유로 아이를 낳고 싶지는 않았다고 한다. 석연치 않은 대화로 감정이 묻은 채 여행은 막을 내린다. 마지막 만남 후 언니는 귀국한다.
주인공은 아이를 낳고 예전보다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 아이가 생기고 프랑스에도 자기 삶이 생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친척들의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서운함도 옅어진다. 프랑스에서 함께 빗속을 뛰어갔던 추억을 생각한다.
언니 생각을 하면 여지없이 보고 싶어 진다는 말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격정의 세월을 함께 보냈던 언니였기에 평생 마음에 남을 것 같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처지가 바뀌면서 관계도 달라진다. 나의 상황이 바뀌면서 상대방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방식도 바뀐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그렇지만, 서로 허물없이 진심으로 관계를 맺었던 순간은 오래오래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잔잔한 추억이 되어 그리운 순간으로 남는다는 것을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