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터운 시집 한 권을 다 읽고도 한마디로 설명할 맥락을 짚어낼 재간이 없어 시인이 펼쳐놓은 풍경과 마주해 시인에게 편지 쓰는 마음으로 써 보기로 한다. 가을은 편지 쓰기 좋은 계절이라서...
시인은 밤이면, 과거에 다녀오는 것 같다. “추억을 미래에서 미리 가져와”(「촉진하는 밤」), “상기하는 마음으로” (「촉진하는 밤」) 등 능멸, 호위, 아둔, 누추, 참혹, 당도, 오도카니, 올무, 분멸, 벼랑 등 먼 과거에서나 쓸 것 같은 단어들을 끌어와 시 속에 숨겨 두었다. 그가 과거에 다녀왔다는 흔적이다. “지금보다 늙었을 적에는”(「건강미 넘치는 얼굴」)이라고 미래에 다녀온 이야기도 쓴다. 다음 시를 보자.
“그토록이나 스무 살을 기다리던 심정이
며칠 전처럼 또렷하게 기억나는 한편으로
기다리던 며칠 후는
감쪽같이 지나가버렸다.”
― 「며칠 후」 부분
며칠 후엔 눈이 내리겠지(프랑시스 잠의 시 「며칠 후엔 눈이 내리겠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밤새 눈은 내려서 온 천지에 내려서 백색의 세상처럼 내 기억도 지워서 싹 다 지워서 여나무살 아이처럼 눈사람을 만들고 눈을 뭉쳐 던져 대겠지. 땀이 나면서도 손가락이 빨개져 움직이지 않을 즈음, 집에 들어가 시인이 마셨다는 유자차나 마셔볼까. 시인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공연] 중에서
“충분하다는 건 기쁘다는 것과 좀 달랐다
그녀는 완전하게 기뻐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든 일에서 분노를 잔향처럼 느꼈다
그녀는 단 하루도
죽음을 떠올리지 않은 적 없었다
평생 동안 사랑해 온 단 한 명을 대하듯 했다.”
― 「이 느린 물」 부분
‘맹렬히 그 모든 것과 맞서다가, 고요히 사라지고 싶다가,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 사랑을 시작하는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는 시인의 고백을 듣는다. 결국, 사랑은 마음 가장 깊은 곳, 그곳에서 시작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보인다. 충분히 사랑할 수 없어서 분노했고, 사랑받지 못해서 죽음을 떠올리는 것이 인간 존재의 속성일까.
세상을 접시만 하게 작게 보기도 하고, 접시를 세상처럼 크게 보기도 하는 유연함(「접시에 누운 사람」), ‘i’가 되었다가 ‘아이’가 되었다가 넘나드는 사연을 듣기도 했다. (「누가」, 「머리말」) 두 편의 시는, 그의 전작 『i에게』의 후속 편 같은 느낌도 들었다. 「누가」나 「영원」처럼 상상의 이야기도 펼쳐진다. 언뜻 읽어서는 무슨 말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이야기들도 있었다. 다음 글도 그랬다.
“누군가 가리키는 과거가 미래라는 지당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가 누군가가 가리키고자 하는 미래가 과거라는 것을 눈치챘다가 미래가 더 이상 미지가 아님을 증명해 보는 밤”
― 「푸른얼음」 부분
시인은 과거와 미래를 넘나 든다. 또한, 시인이 종횡무진 다니는 곳은 낮과 밤이다. 잠, 꿈, 햇빛, 윤슬, 해, 달 저녁 등 수많은 밤들을 묶어 놓은 「푸른얼음」은 수많은 표정을 모아 놓은 「얼굴이라도 보고 와야겠어」와 같은 방식의 시 쓰기이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 끊임없이 깊이 생각하고 내밀히 관철한 시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촉진하는 밤』은 시인이 밤마다 잠들지 못하고 떠도는 생각과 말과 깊은 사유, 겨우 잠든 꿈까지도 벼르고 벼려서 쓴 사유의 진액 같은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