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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휴 Aug 09. 2024

주인이 바뀌는 시간

별들아! 부탁해!

농부가 되고 나서 시간마다 주인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내 하루 24시간의 온전한 주인이 아니고, 때마다 그 시간을 담당하는 주인공들이 있어서 나는 잠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새벽은 거미의 시간이다블루베리 열매를 따려고 새벽길을 달려 농원에 도착한다. 눈을 홉뜨고 살피는 것은 주렁주렁 매달린 블루베리 열매보다 거미가 쳐 놓은 거미줄이다. 거미의 사냥감이 되지 않으려면 농원까지 따라온 새벽잠을 서둘러 떨쳐내야 한다.     



기습적으로 얼굴을 덮치는 거미줄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양팔을 휘저어대며 허수아비처럼 엉거주춤한 춤을 추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고개를 갸웃할 풍경이다.    




한낮은 매미의 시간이다. 여름을 물리치기라도 하려는 듯 목이 걱정될 정도로 악을 써 대는 매미들이다. 한낮을 거머쥐고 떼를 쓰는 아이처럼 무언지도 모를 것을 손에 쥐어 줘야만 그칠 것 같은 떼창이다. 그럴수록 진짜 여름이라는 것을 성질 급한 매미 저만 모른다.   



매미 소리가 처절할 만큼 요란한 것은 죽을 때가 다가왔다는 뜻이다. 수컷은 짝짓기 뒤 생을 마감하고, 암컷은 알을 낳고 죽는다고 한다. 매미의 울음이 어쩌면, 생을 놓기 전, 하지 못한 말을 모두 쏟아 내는 것은 아닐지. 또한, 세상에 남길 말을 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지. 사람들이 매미의 말을 못 알아들으니 답답해서 더 크게 목청 높여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매미는 평균적으로 땅속에서 유충으로 7년을 살고 성충이 되어 산란하고 7일 만에 죽는다고 한다. 삶의 내공이 얼마나 깊을 것이며, 전해 줄 말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올여름은 잘 파악되지 않는 매미의 전언을 새겨듣고자 귀를 기울여 본다.




저녁은 모기의 시간이다땡볕이 한풀 꺾이면, 겨우 일할 맛이 생긴다. 장갑이랑 모자, 마스크로 단단히 무장하고 모기 퇴치제까지 온몸에 뿌리면 완전무장 전투태세 완료다.   



저녁의 모기들은 어디에 숨었다가 나타나는지. 그래도 앵~~ 사이렌을 울려 주니 신사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닥치는 불행들도 신호가 있다면 운명이 바뀔 수도 있으려나. 



모기들은 아무래도 내 얼굴의 땀방울과 내 몸의 땀 냄새를 흠모하는 게다. 아무리 팔로 내 저으며 쫓아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처방전에도 없는 주사를 한사코 놓곤 한다. 이쯤 되면, 모기의 시간에 밀려 거꾸로 내가 쫓기듯 농원에서 퇴장해야 한다.    




밤은 풀의 시간이다낮에 뽑아 놓고 다음 날 와 보면, 불쑥 또 다른 풀들이 자라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주인이 돌아서면 자란다는 풀들이라 내 눈을 피해 밤중에 몰래 큰다. 풀들이 속성 과외를 받는다는 소문도 바람결에 들었던 것 같다.     



내가 잠들어 있는 시간에 자라는 풀과의 전쟁은 애초에 평등하지 않은 시합인지도 모르겠다. 밤잠도 안 자고 부지런히 자라는 풀에게 억지소리나 하는 부끄러운 나다.     




밤은 또 별의 시간이다. 주위가 어두울수록 더 빛나는 별들은 어둠에 묻힌 사위를 말없이 지켜 준다. 어느 날, 농장에 놓고 온 휴대전화를 찾으러 갔던 밤. 밤하늘에 가득 찬 별들이 주인 없는 틈에 농원을 지켜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매일 퇴근하며 농원의 안부를 별들에게 맡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밤은 나의 시간이기도 하다. 하루를 동동거리며 집안과 농원에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난 후, 모든 일과를 마치고 잠들기 전 밤 11시. 그제야 내 시간이 온다. 그때 나는 컴퓨터에 앉아 양 손가락을 기역자로 구부리고 빈 화면을 응시한다. 풀은 나 몰래 자라고 있고, 머리 위에 별은 보초를 서고 있고, 나는 쓰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이 순간을 위해 새벽은 거미에게, 한낮은 매미에게, 저녁은 모기에게 내어주고, 밤은 풀, 별과 함께 나눠 갖는다. 곤충과 식물과 천체에게 양보해도 하루의 끝에는 쓰는 시간이 있으니 부족 하지 않다. 지치고 힘들어도 쓰며 충만해 진다. 이 순간을 위해 기꺼이 하루를 허겁지겁 달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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