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림 하우스 안, 블루베리를 심을 화분에 흙 채우는 작업이 한 달 넘게 진행되고 있다. 집안에서는 늘 돌봄이 필요한 둘째가 농장 일을 시작하며 큰 힘이 되고 있다. 무거운 통을 함께 옮기거나 흙덩이를 담은 쓰레받기를 들어 가장자리로 옮기는 일도 둘째의 몫이다. 블루베리 전용 통에 채우는 흙은 호밀을 심어 갈아엎은 흙과 소나무 부산물인 우드칩을 섞어 발효한 흙이다. 가끔, 비닐이나 노끈 등의 쓰레기가 섞여 있어 통 안에 들어가지 않도록 찾아서 빼내야 한다.
둘째는 매의 눈을 가졌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쓰레기가 발견되면 '어머'라고 엄마의 특허 감탄사를 제 맘대로 사용하며 쓰레기를 주워낸다. 포클레인이 부어주는 흙 속에는 진흙 덩어리와 돌도 있어 그것들도 찾아내야 한다.
연동 하우스의 구조는 2m 간격의 가로막과 천장 쪽의 막대 때문에 고난도의 포클레인 기술이 필요하다. 초보 운전자가 통 주변에 사정없이 흘려 놓은 흙무더기를 쓸어서 다시 통 안에 담는 일이 내 역할이다. 작업 한 달째, 손으로 흙을 만지기만 해도 쓸모없는 진흙 덩이인지 부셔서 사용해야 할 거름 덩이 인지, 꼭 골라내야 할 돌인지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풀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바닥에 부직포를 깔고 못을 박아 핀으로 고정한다. 한두 번의 망치질로도 땅 속에 돌이 있는지 단단한 흙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힘만으로 계속 망치질을 했다. 그러다 보면, 핀이 구부러져 어쩔 수 없이 뽑아서 버려야만 한다. 핀이 안정적으로 들어갈 때까지 다른 손으로 붙잡아 주면서 망치질을 해야 제대로 고정된다. 아이를 키울 때도 그렇지 않을까, 자리 잡고 제 몫을 해낼 때까지는 부모가 단단히 붙잡아 줘야 제대로 설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그토록 되기 싫었던 농부가 되어가는 중이다.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 것은 흙 속에 섞여 있는 굼벵이다. (탈바꿈하는 곤충의 유충, 주로 매미나 딱정벌레목 애벌레를 지칭한다. 장수풍뎅이나 흰 점박이 꽃무지 애벌레 등)
우리는 어쩌다가 굼벵이가 보이면 ‘둘째야! 굼벵이다’라고 말하고 둘째의 하는 양을 지켜본다. 어른 손가락을 말아 놓은 듯 동그랗게 말려 있는 하얀 굼벵이를 처음 보는 둘째는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꿈틀거리는 것이 무서워 10m는 뒤로 도망가던 둘째가 지금은 화색이 돌며 반기는 얼굴로 변한다. “어머! 굼벵이다!”라고 외치며 쫓아가서 손으로 냉큼 집어 굼벵이를 모아 놓은 통에 담는다.
어렸을 때 산골에서 자랐다. 아빠는 늘 바깥일로 바쁘셨고, 농사와 집안일은 엄마의 몫이었다. 일꾼 아저씨가 항상 있었다. 우리 오 남매는 새벽마다 무슨 일인가를 한차례 끝내고 아침밥을 먹었다. 모내기철에는 동트기 전에 일어나 모내기를 하려고 물을 받아 놓은 논에 들어갔다. 차가운 물에 발을 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고 거기까지 따라온 잠이 십리는 달아나곤 했다. 나와 여동생은 가냘픈 종아리에 거머리가 붙으면 모를 내던지고 바깥으로 나가 손으로 떼어 내지도 못하고 팔짝거렸다. 엄마가 혀를 차며 떼어 주셨고, 남자 형제들은 깔깔거리며 놀렸다. 모를 심는 중에도 행여나 거머리가 보이면 '엄마!' 소리를 지르며 논두렁으로 도망치기 일쑤였다. 밤이 익어서 떨어지는 가을이면 바가지를 들고 밤밭으로 갔다. 산자락과 실개천이 있는 곳을 뒤지며 밤을 한 바가지씩 주워서 집에 돌아와 아침밥을 먹고 학교에 갔다.
학교가지 않는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엔 엄마 일을 거드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엄마 혼자 농사를 전담하시다 보니 올망졸망 오 남매가 얼마나 기술적으로 농사일을 거들었겠는가 마는, 그래도 여럿이 움직이니 엄마 혼자보다는 수월한 구석도 있었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오 남매가 엄마의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걱정을 덜고 있는 순간은 아니었을까 싶다. 개구쟁이들이 엄마가 들에서 일하는 동안 무슨 말썽을 피울까 걱정도 하셨겠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흘러내린 흙들을 쓸어 담고 있는 동안 둘째가 팔짱을 끼고 건들거린다. 다음 차례의 일을 하기 싫어서 노동요로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휘파람으로 따라 불고 있다. 이것 해라, 저것 해라 하도 말을 많이 해서 말할 기운도 없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생각한다. 혼자 있는 시간에 갖가지 말썽을 피우느니 차라리 내 눈앞에 있는 것만도 안심이 된다.
초보 포클레인 운전자는 한 달 동안 실력이 몰라보게 늘었다. 기둥도 두어 개 구부려 놓고, 문짝도 비틀어 놓으며 쩔쩔매던 실력이 이제는 가로막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여유롭게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가끔, 무지막지한 흙무더기를 쏟아 놓고 줄달음친다. 이번에도 기둥 때문에 각도가 맞지 않아서 그렇다는 어설픈 핑계를 대고 바쁘게 돌아서 간다. 나의 도끼눈이 포클레인 꽁무니를 따라가고 둘째의 타닥거리는 발소리가 들린다. “어머! 굼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