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 구경이 끝나면 나무에 새순 올라오는 신비함에 감탄한다. 농장 옆 은행나무에 손톱만큼 이파리가 보이더니 며칠새 손가락 한 마디쯤 커졌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짙어지며 잎들이 자란다. 나무에서 잎이 돋아난다고만 생각했는데 올해는 나무가 온 힘을 다해 이파리를 밀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가 이파리를 키워서 그 이파리로 인해 살아가듯이, 사람도 지식과 지혜를 배워서 그 힘으로 살아간다. 우리도 농부가 되어 작물을 키워 그 생명력으로 살아가야 한다.
블루베리를 심을 준비로 화분을 배치하고 흙을 채우는 작업을 마쳤다. 전문가는 화분의 흙을 세심하게 만져보더니 물 빠짐을 더 좋게 하려면 왕겨를 섞어야겠다고 말했다. 적어도 화분의 중간 부분까지는 골고루 섞으라고 조언했다. 마무리가 된 줄 알았던 공정이 본의 아니게 동시다발로 주어졌다.
급하게 왕겨를 구할 곳을 찾았다. 미곡처리장 담당자가 "2월에는 왕겨를 구하기가 보릿고개만큼 힘들다"라고 말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겨울방학에는 학교급식을 안 하기도 하고, 쌀을 판매할 만큼만 조금씩 도정을 하기 때문에 왕겨가 귀하다고 한다. 그만큼 구하기 어려워 축사나 농사에 쓰려고 대기자도 많다고 설명했다. 우연히 어느 축사에서 비축해 둔 쓰지 않는 왕겨를 가져가도 좋다는 소식을 듣고 1톤 트럭으로 수차례 실어 날랐다.
조금 부풀려서 말하자면, 비닐하우스 안에 왕겨 포대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으니 그 일을 언제 다하나 싶어서 골치가 아팠다. 인부를 사서 하루에 끝내고 다시 깨끗하게 정리해놓고 싶은 내 마음과는 달리, 남편은 우리 가족끼리 해 보자고 한다.
힘들어서 어떻게 하냐고 말이라도 꺼내 보았지만 어림없는 일이다. 그래서 둘째까지 합세해 겨우겨우 사흘 만에 화분 위로 수북하게 왕겨를 쌓아 올릴 수 있었다. 하루하루 일의 진척이 보였고, 짐처럼 느껴졌던 왕겨 포대가 줄어들어 공간이 확보되는 것도 좋았다. 화분마다 듬뿍 쌓인 왕겨를 보니, 누런 나락을 보관해 놓은 듯 예고도 없이 갑자기 큰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이 지점에서 왜 엄마 생각이 날까. 식구는 많고 일만 산더미처럼 쌓여 하루하루가 고비였을 것이다. 엄마는 무슨 낙으로 그 모진 세월을 살아내셨을까? 엄마가 짓던 많은 농사들이 모두 우리 논밭이었다면 덜 힘들었을까? 문중 땅이 있어서 농사를 지어봐야 남는 건 얼마 없었을 터다. 오 남매가 무섭게 자라나고 있었으니 그 학비와 입성, 먹성도 겁이 나지 않았을까?
농장을 마련한 후, 날마다 전화를 하셔서 우리의 일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걱정 반, 물음 반으로 궁금해하시는 그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매일 진척 상황을 보고 드려야 해서 우리끼리 엄마도 모르게 "최 회장님"이라고 승진시켜 드렸다. 엄마는 그냥 좋으신 것이다. 퇴직하고 농부가 되겠다고 땅을 사서 일을 시작하는 자식이 걱정도 되면서 한편으론 대견하시기도 하실 것이다. 블루베리와 복숭아를 수확하게 되면, 특상품으로 골라서 제일 먼저 부모님께 갖다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면 힘들어도 웃음이 난다.
그나저나 그 많은 왕겨를 흙과 섞을 생각을 하니, 머리가 또 아파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무리하게 해 왔던 농장 일로 온몸이 쑤시고 아파서 도저히 작업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인부를 사서 짧은 기간에 일을 마치면 좋겠는데 남편은 스스로 해보겠다고 한다.
"이 많은 걸 언제 다 해요? 나무 심을 날짜도 다가오잖아요."
"해 봐야 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알지, 해보지도 않고 왜 못한다고만 생각해!"
"내가 힘들어서 함께 할 수도 없고 혼자서 어떻게 하려고요."
"일단, 해 봐야지!"
섞는 일을 지켜보니 하루에 80개 정도 섞을 수 있었다. 한 개의 화분에 60번 넘게 삽질하니 대략 500번의 삽질로 8시간의 일과가 마쳐졌다. 흙을 섞으면서 돌이나 흙덩이 등 이물질들을 골라내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나와 둘째까지 협업을 하면 120개도 무난히 마칠 수 있었다. 이틀을 참여했다가 허리 통증이 심해져 다시 남편 혼자 섞는 작업을 하고 있다.
다른 일정이 있는 날을 빼고 일주일 정도 일을 하다 결국에 남편도 몸살이 났다. 피부도 검게 타고, 살도 많이 축났다. 삽질해 본 경험도 없는 사람이 양손에 군데군데 물집이 잡히더니 단단하게 굳어졌다.
"이래야 진짜 농부지!"라며 굳은살이 훈장이라도 된다는 듯 자랑하고, 매만지며 웃는다.
그토록 되고 싶었다는 농부가 되어가는 길이 녹록지 않다. 일이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늦은 나이에 급하게 시작하려니 몸이 몰골이 아니다. 나무처럼 내보낼 진액도 부족해서 허덕이지만 없는 힘이나마 보태며 시간의 힘에 기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