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영주권이 부착된 여권을 수령했다. 인터뷰를 본 지 1주일, P4 레터 받은 지 3개월, NIW 신청한 지는 3년 만이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렸다. 많이 기다려왔는데, 막상 수령하고 나니 기분이 묘하다. 훗날 수십 년이 지나고 돌이켜 볼 때, 오늘이 우리 인생의 2막의 시작으로 기억될까.
NIW신청한 후로도 아이들이나 부모님과 그리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이번에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부모님은 아들과 손주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점을 담담히 받아들여주시는 것 같다. 아이들은 아직은 생활의 변화를 바라지 않는 눈치이나, 이제 막 한국 교육의 매운맛을 보기 시작한 터라, 그곳에서의 생활에 솔깃해하고 있다. 사실 나 역시 귀동냥으로만 들은 세계이니, 아이들에게 얼마큼 긍정적인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가족뿐 아니라, 나 자신도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없으니 막연한 느낌만 든다. 언제든 가서 살 수 있는 '영주'권을 비로소 얻었지만, 가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어떤 조직에 속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외국 회사에 10년 이상 근무하였고, 미국에서 생활한 경험도 있는 와이프는 상대적으로 이 도전에 대해 덜 어려움을 갖고 있어 보인다. 하지만 애초에 이 이민의 주 콘셉트는 내가 일하고, 와이프는 쉼을 가지면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공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외국에서 생활을 해야겠다 생각한 건 수없이 많았다. 졸업 후 포닥을 간 선배들과 달리, 회사로 바로 들어온 게 늘 미련으로 남은 것 같다. 지난 20년간 여러 가지 이유로 이민을 생각해 왔다. 30대에는 맑은 날씨가 끌려서, 40대에는 아이들 교육환경이 부러워서, 그리고 지금은.. 한국에서 5년 후의 커리어가 보이지 않아서. 어찌 되었건 지금보다 좋은 기회는 없어 보인다. 이미 이직을 하기엔 늦은 나이니, 오늘이 구직자로서는 가장 젊은 나이이다. 7월에 첫 랜딩을 하고 나면 정식 영주권을 받게 된다. 올 하반기에는 후회 없을 도전을 해야 하고, 좋은 결실이 있었으면 좋겠다.
어젯밤, 오랜만에 느긋한 마음으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Revolutionary Road. 영화 속에서 여주 에이프릴은 반복되는 가사 노동과 권태로운 일상에서의 탈출구로' 파리(Paris)에서의 삶'을 꿈꾼다. 반면 남주 프랭크는 속물적인 직장인과 자신은 다르다고 믿지만, 막상 승진과 연봉 인상의 기회가 오자 현실에 안주하려 한다. 이 둘에게는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이 공통되게 있으나,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서로 달랐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영화 속 많은 부분에 나를 투영하며 보게 되었다. 나 역시 '특별한 사람'이라는 환상에 둘러 쌓여 있지는 않은지. 특별하지 않다면 도태될 것이라는 공포감이, 미국을 나의 '유토피아'로 설정하고 이 길을 시작한 것은 아닌지. '지금과 다른 미래'라는 희망을 갖는 것이 나를 앞으로 끌고 나갈 것인지, 블랙홀로 끌어내릴 것인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지금 이 생활을 끝내고 싶은 것은 맞지만, 유토피아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현실감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