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섯 가지의 매력
우리의 내면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이런 바람은 그야말로 ‘뜻밖’이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그걸 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8월 말, 늦여름의 경주를 찾았다. 어쩌다 혼자 떠난 여행이었다. 경주는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한 번 가봤을 뿐이었고, 근거도 없이 그저 고루하다는 이미지로 남아 있는 곳이기도 했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은 덕분일까, 인스타와 유튜브로 예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이번 여행에서는 뜻밖의 마법 같은 순간들이 꽤 자주 찾아왔다. 해 질 녘 월정교는 첫눈에 사랑에 빠질 만큼 낭만적이었고, 한낮에 걷는 대릉원은 타임슬랩 드라마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게스트 하우스는 쌓여있는 책부터가 내 취향이었고, 사람들과 잠깐의 대화는 청춘이 된 것 같았다. 음식은 맛있었고, 북카페의 공간은 편안했다.
뜻밖의 발견이 주는 기쁨이 어디 여행뿐일까 싶지만, 여행만큼 그 확률을 높이는 것도 없으리라. 고맙다 경주,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이 들 때, 내 생각을 교정해 줘서.
'Happiness comes of the capacity to feel deeply, to enjoy simply, to think freely, to risk life, to be needed. (행복은 깊이 느끼고, 단순하게 즐기고, 자유롭게 사고하고, 삶에 도전하고, 남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능력에서 나온다.)'
게스트 북 표지에 쓰여 있던 명언과 무심히 쌓여있는 책들이 좋았다. 게스트하우스 이름을 딴 '딮슐랭 가이드'는 나같은 무계획 여행자에게 한줄기 빛이었다. 도미토리 한 방을 같이 쓴 한 여행자는 대뜸 뜬금없이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토해내 날 웃음 짓게 만들었고, 곧 각자의 침대에 누워 시간차를 두고 코를 골아댔다. 우연히 같은 날 같은 장소에 묵는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는 가히 여행의 맛이리라 싶었다.
첫눈에 반했다. 차를 타고 월정교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혼자 감탄사를 낼 수밖에. 천년의 비밀을 간직한 듯 신비로웠다. 유럽 어느 도시의 야경이 부러울까, 이렇게 멋진데. 날이 밝고는 서출지를 갔다. 서출지는 신라시대의 못이라고 한다. 배롱나무가 꽃을 피운 여름의 순간은 또 다른 낭만을 만들고 있었다. 밤과 낮, 그 다른 결의 낭만의 빛이 경주 안에 있었다.
나에게 '경주다움'이란 능이 만드는 곡선과 아득하면서도 매혹적인 분위기이다. 아침엔 커피 맛으로 유명한 커피플레이스에 들려 스텝 라떼를 시켜 마시고, 저녁엔 흐흐흐 라는 수제 맥주집에 들렀다. 둘 다 각자의 맛으로 유명하지만, 능을 둘러싼 분위기도 경주의 마법 같은 순간을 완성해 주는 요소일 거다.
어느 도시를 여행하든 꼭 방문하고 싶은 공간 중 하나는 북카페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카페 이어서는 여러 면에서 매력적이었다. 여름의 초록빛을 머금은 창가에 책을 볼 수 있는 자리를 길게 배치한 것이 그랬고, 커피와 함께 제철 과일을 주문할 수 있는 메뉴가 그랬다. 심플하지만, 책에 집중할 수 있는 인테리어와 LP음악도.
음식에 낯을 가리는 나였기에, 새로운 메뉴에 이토록 감탄한 적이 많지는 않았다. 육회로 물회를 만든다니? 아침 일찍 서둘러 찾아간 함양집은 이미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특으로 주문하고 맛을 보는데, 세상에... 저, 여태까지 이렇게 맛있는 걸 모르고 살았다고요? 한우물회 먹고 싶어서 경주를 다시 올지도 모르겠다. 경주에서 눈 뜬 새로운 메뉴 중에는 그라니타도 있었다. 바넘커피에서 맛본 달콤한 커피 얼음 디저트라고 할 만한 메뉴, 여기도 또 갈 곳으로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