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극으로 가기위해서
꾸준하지 못한 내가 나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일기... 이것도 꾸준하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
내 인생 중 몇 번의 큰 변화들이 있었는데, 대체로 환경이 바뀌거나, 사람이 바뀌거나, 내 건강이 바뀌거나, 내 신분이 바뀌는 것 들이었다. 어릴 적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여러 군데로 이사를 많이 다녔는데, 기억하는 지역만 3군데에서 4군데 정도 되었고, 작은 이사를 포함하면 10번은 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악착같이 살아오신 부모님. 어느 부모님이 그렇지 않으랴만 우리 부모님은 참 대단하시다. 어머니는 20살에 나를 뱃속에 품고 24살에 어린 나이에 (만 나이로는 23도 안되셨을 아버지) 공직생활을 시작한 아버지. 내가 그 나이 때 고민하던 것은 군대 문제, 이성문제, 진로문제 등 인생을 시작도 해보지 못한 햇병아리의 삶이 었는데...
어른들은 참 대단하시다. 여차 저차 하다 보니 나도 아버지처럼 공무원의 길을 꿈꾸며 공부를 하던 시절도 있었고 (그러나 공무원의 삶을 동경한 적은 없었다. 늘 퇴근이 늦던 아버지), 결혼을 한다고 여자 친구를 데려와 인사를 시키기도 하였다. 내 나이 30이 다 되어가는 지금, 솔직히 나는 너무 허접하다. 허접이라는 단어가 초등학교 때인가 유행처럼 퍼졌는데, 게임을 잘 못하는 애들이 허접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특히 채팅창에는 '허졉, 허접이네~'라는 말은 남녀 불문하고 누구나 하던 도발행위였다. 그런데 참 내가 스스로에게 도발을 해보고 싶다. 허접하다. 사실이 그러니 억울하지도 울컥하지도 않는다. 허접한 내 삶을 조금 더 돌아보면 이렇다.
시골 영주라는 작은 소도시에서 태어났고, 조금 더 작은 지역으로 옮겨가 살았다. 봉화라는 군 단위의 시골마을이었다. 엄마의 고향이고 아빠의 첫 부임지였다. 나에게는 역사적인 그곳에서 살아가다가 다시 태어난 영주로 가 아파트에서 살기 시작하였고, 3년마다 발령이 나는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의 고향 의성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이 시기가 우리 어머니에게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결혼을 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미안 엄마. 내가 그 시절로 잠깐 갈 수 있다면 엄마에게 힘내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숨 막히는 시댁 살이 했을 우리 엄마. 어머니. 어린 나이었지만 엄마가 힘들어하는 것을 한 순간 느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엄마에게 큰 위로가 되진 못했다. 나도 그때는 미취학 아동이었어, 라는 변명뿐이다.
아버지는 의성에 작약 시험장에서 일하셨는데, 관사를 얻으셨고, 그때부터 나와 어머니 아버지는 조금 더 산속 깊은 곳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내 동생은 그때 4살쯤 되었을 것 같다. 나와 3살 터울의 여동생과는 참 다양한 사연들이 많다. 어릴 적부터 아토피를 많이 알던 동생은 늘 예민했고, 생활이 불편해 보였다. 지금의 나보다도 어렸던 엄마는 이른 결혼과 출산으로 겪지 못한 대학생활을 도전했고 나와 동생은 관사에 남아 저녁마다 엄마를 기다리는 생활이 시작되었을 때였다. 10살도 되지 않는 아이들 둘이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이 없었다. 아버지의 사무실이 엎어지면 코 앞인 위치였지만 어린 마음에 그 커다란 건물은 내가 함부로 들어설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어른들의 일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늘 있었던 것 같았다. 한 번은 동생이 너무 아팠다. 아마도 독감이었을까? 열이 오르고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 엄마는 안동에 있는 대학교에 간 때였다. 핸드폰,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었고, 전화번호를 달달 외우거나 집에 전화번호 기록장이 한 권쯤은 있던 시절에 나는 발만 동동 구르게 되었다. 아픈 동생 손을 이끌고 옆집에 찾아가 같이 울기 시작했다. 동생이 아프다고. 도와달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찔하다. 그 당시에는 동생이 아픈 것보다 그런 상황을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게 서러워 더 울었을 것 같다. 이후에도 동생과 얽힌 일들이 참 많았다. 엄마와 함께 대학교에 가서 저녁 강의를 듣고 오겠다는 엄마의 말을 듣고 차에서 동생과 함께 잠이 들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사라진 동생. 제대로 걷지도 못할 애가 사라지니 엄마는 정신이 거의 없었고, 나는 스스로 잠이 들었다는 것에 죄책감과 걱정에 눈물이 쏟아졌다. 알고 보니 여자아이가 귀엽다면 동생을 데려나간 여대생들의 소행. 좋게 말하면 이뻐해 준 거고 나쁘게 말하자면 유괴다. 타인의 의지에 반하여 행동의 자유를 침범하고 장소의 이동을 불가하게 했으니까. 그런 저런 일을 겪고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했나. 대형견을 원래 좋아하시던 부모님 덕에 나는 내 생에 가장 큰 강아지를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세인트 버나드. 초대형견에 속하며 순한 녀석들이다. 실제로 저렇게 아이들을 태울 수 도 있지만 허리에 좋지 않다.
실버라는 친구는 수컷 강아지였는데, 나랑 영혼이 통한 첫 강아지고 가장 착한 강아지였다. 시골 산속에 살던 나에게는 가장 마음을 많이 줄 수 있는 반려자였다. 한 번은 아주 캄캄한 거실에 둘이 마주 보고 앉았는데, 내가 주먹을 실버 입 앞에 가져다 대고 내 입을 벌리자 따라 벌렸다. 그래서 손을 커다란 입안에 집어넣었고, 다시 내 입을 다무는 시늉을 하자 따라 입을 다물던 실버. 상대방의 동작을 따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지금까지도 이렇게 할 수 있는 게는 키워본 적이 없다. 머리는 좋아도 상대방을 흉내 내는 것은 판타지에 가까운 일이었다. 20년도 더 전의 일이니 내 기억이 왜곡된 것 일 수도 있겠다. 너무 커지고 나서는 산책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묶여 지내다가 죽은 실버에게는 참 미안하다. 스위스 알프스 산에서 살 녀석들을 억지로 반도에 끌고 와 살게 하니 얼마나 답답하고 초라했을까. 다 자신의 위치와 역할이 있는데 좁은 집 울타리에서 짖기나 하고 있었을 녀석이 그립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될 무렵 대구에 이사를 가게 되었다. 대구라는 곳은 내가 살아본 곳 중 가장 큰 도시였고, 없는 게 없는 신식의 문화가 있는 곳이었다. 역시나 발령을 받은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이동한 것인데 지금 생각하면 결과론적이지만 시골에서 더 살았으면 내가 행복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 무렵 살이 찌기 시작했다. 피자, 핫도그, 햄버거, 콜라, 치즈 등 서구식 식습관에 길들여지기 시작했고, 날렵하던 몸은 점차 부풀어가기 시작했다.
포동포동한 것이 미의 기준으로 잠시 남아있던 시절이었던가? 새천년이 들어섰음에도 어른들은 그저 충실하고 장군감 같은 풍채가 멋이라고 말하였는데, 무슨 궤변인가 싶다. 1년에 10kg씩 팍팍 찌던 그 시절, 운동량은 줄어들었다. 자전거를 하루 종일 타고 도롱뇽 잡고, 도마뱀 구경하고, 달리기 시합하던 시골 초등학생이 신도시에 와 물들어가는 과정은 처참했다. 컴퓨터라는 게 생겨 각종 온라인게임에 물들며 동생과 더 자주 싸우게 되었고, 누가 더 오래 게임을 할지 머리를 굴리는 게 하루의 최대 관심사였다. 밖에서 같이 놀 친구들이야 있었지만 주로 컴퓨터 게임이 공통 관심사였다. 바람의 나라, 디아블로 2, 스타크래프트, 크레이지아케이드, 메이플스토리 등 점차 다양한 게임들이 나타났고 내 영향을 받은 여동생은 지금도 컴퓨터 게임을 좋아한다. 그렇게 퉁퉁해지던 시절 퉁퉁한 친구들끼리 레슬링 놀이를 하며 지냈고, 이사를 참 자주 다니던 우리는 같은 지역 내 다른 학군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어머니의 한 수. 내가 어울리던 친구들과 모두 헤어지고 나는 다른 동네의 중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내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중학교 시절이 생각난다. 그 맘때 나는 아지트를 만들었고, 현실의 탈출구를 찾아냈으며, 인간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시작하였고, 외모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사람은 참 환경의 동물이다. 즐겁기만 하던 초등학교 시절 이후 내가 알던 이 하나 없던 그 새로운 동네에서 나는 늘 그랬듯이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내 모습을 몰랐다. 뚱뚱하고 엉뚱하던 나는 시골의 순수함을 여전히 간직한 촌사람이었고, 제단 된 옷을 갖춰 입고 앉은 중학교의 교실은 나를 받아들이기에는 고도로 훈련받은 특수부대에 갑자기 전출을 온 일반병사를 경계하고 멸시하는 공간이었다. 내 상상력을 받아주던 초등학교의 순수한 친구들은 사라졌고, 이권과 성공에 눈을 뜬 소년들의 힘겨루기가 이뤄지는 공간이었다. 내생에 최초로 놀림을 받았고, 뚱뚱한 외모 덕에 멸시를 받았으며, 내가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키 160 정도에 몸무게가 78-80 사이를 왔다 갔다 했는데, 그 시절의 사진은 현재는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그 시절의 나를 사랑해주고 싶은데, 그 시절의 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했다. 쳐다보기도 싫은 욕실의 거울과 자동차에 반사되는 내 실루엣. 숨 막히는 턱살과 피어오르는 청춘의 여드름은 나를 더 더럽고 추악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자존감이 떨어졌다. 머리가 크네, 배가 어떻고 가슴살이 어떻고, 턱이 몇 개니 하는 이야기가 듣기 싫어 어깨가 움츠러들었고 바닥을 쳐다보며 걷는 버릇이 생기기 시작했다. 영주, 봉화, 의성에서 놀던 나는 도시에 적응하여야 할 시기가 찾아왔던 것이다. 내 인생 최초로 다이어트를 결심했고, 무언가를 간절하게 갈망한 것은 처음이었다.
겨울방학이 찾아오는 쌀쌀한 초겨울, 저 운동복 세트 몇 벌만 사주세요. 그 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 한마디의 용기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길 바랐다. 놀림받고 이불 밑에 숨죽여 울던 내게 다가가 한마디 할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래 살은 빼고 싶으면 꼭 빼라. 그게 네가 지금 가장 간절히 원하는 거니까. 그런데 굳이 왜 그렇게 학교와 친구에 매달리니. 20년 뒤의 너는 친구도 조직도 싫어하는 반사회적인 인간인데. 학교 안 가도 되고 싫은 사람 안 봐도 돼. 세상은 너무 넓다고. 이렇게 말해줘도 모른다. 어른들이 하는 말, 그때도 지금도 잘 안 들으니까. 사람은 죽어도 안 변하는 게 있다. 그렇게 옷 두 세트를 사주신 어머니는 무슨 생각이신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해하신 기억이 난다. 내 몸매가 그 모양인 게 미안하신 건지, 좋은 옷을 주지 못해 미안하신 건지. 근데 어머니 탓이 아니고 내가 먹고 자고 싸기만 한 탓이니 난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냥 죽어라 운동을 하고 싶었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다. 그렇게 바뀌지 않던 내 습관을 바꾸기 위해 매일매일 뛰기 시작하였다. 단 하루도 낭비하지 않았다. 학원을 마치면 저녁 7시즘이 되었다. 밥을 먹고 나서 사주신 운동복으로 환복을 했다. 처음에는 몸에 꽉 끼는 게 몸매 후진 아저씨가 타이트한 줄무니 체육복을 입고 운동장을 뛰는 행색이었다. 꼴 보기 싫은 핏인데 나는 참 부끄럼도 없이 당당히 운동장으로 갔다. 그리고 줄넘기를 허리춤에 둘러매고 농구공을 구석에 잘 숨겨두고는 한 바퀴, 두 바퀴 그냥 하염없이 돌기 시작했다. 숨이 차고 찬 공기에 머리는 어질 해도 그냥 달렸다. 더 이상 나 스스로를 고통받는 육체에 가둬둘 수가 없었다. 뚱뚱한 소년은 교실의 가장 약한 먹잇감 중 하나였을 뿐이다. 중학교 겨울 방학이 꽤나 긴 편이었는데 1달 반 정도 되었을 것이다. 뛰기 시작한 때가 79kg이고 고지혈증에 경도에서 중도비만으로 넘어간 시기였고 키는 고작 160 초반의 키였다. 신은 견딜 수 있는 크기의 고통과 시련만 준다던데,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신의 유무는 모르겠고, 고통과 시련을 겪어낸 이들이 살아남아서 만든 말이라고 하고 싶다. 실패한 이는 죽어서 말을 못 하는 것뿐이다.
한 달 반이 지난 무렵, 나는 조금씩 변화한 내 모습에 너무 익숙해 변화를 느끼지 못했지만,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키도 훨씬 커져 160 후반의 키가 되었다. 닭가슴살 같은 개념도 없고 헬스장이란 것도 몰랐던 시절 그냥 무작정 달리기랑 줄넘기 농구공 던지기만 하던 나는 12kg을 뺐는데, 내 생에 첫 다이어트였고 여전히 성공적인 프로젝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만 근력운동도 좀 같이 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은 남아있다. 어린 시절 놀림받고 살 뺀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버렸다. 어찌 됐든 나는 학교에서 정치와 외교를 배웠다. 기억에 남은 공부는 그게 전부였고, 군사력도 갖추면 최고의 학생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회의 축소판이니까. 어중간하게 그 중간을 지켜오기 시작했다. 적절한 외교, 정치, 밟히지 않을 정도의 군사력. 중간만 하면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인생 선배들의 군대학개론은 사실 뼛속까지 학교생활에서 영향을 받은 이론인 것 같다. 고등학교도 특별할 것은 없었다. 1학년 때는 괜히 좀 논다는 사람들이랑 엮이고 섞이고 싶어서 따라다니기도 했지만 내 성격과 맞지가 않았다. 야자 땡땡이, 당구장, 맥주 한 캔, 담배 피우는 친구들, 그 속에 서 있을 때 중학교의 설움을 보상받는 듯했지만 그게 나는 아니었다. 마음은 아직 산골에서 공룡 책보고 지구과학책 읽고, 개랑 산책하던 시절의 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던 때쯤 어머니께서 날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바로잡아주셨다. 아파트 문을 열기도 전에 맨발로 뛰쳐나오신 어머니는 들고 있던 두꺼운 사무실 슬리퍼로 뺨다구를 시원하게 날려주셨다. 이유는 너무 많은데, 야자 땡땡이에 당구장 근처를 어슬렁 거리다가 나를 보신 건지 누군가 말을 해주신 건지, 연락이 왔고 나는 자연스레 꼬리에 꼬리를 물어줘야 하는 거짓말을 해댔다. 제일 싫어하는 거짓말. 엄마가 제일 싫어하던 것 중하나였는데, 엄마 덕에 그 거짓말을 그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여름방학 1달 동안 지금 내가 머무는 필리핀으로 날아오게 되었다. 그 무리들과 물리적으로 멀어진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도 참 웃긴 게 그냥 같이 안 놀고 세계여행이나 갔으면 한다. 아니면 좋아하는 것이라도 좀 더 해보던가. 어중간하게 살던 나는 돌아와서도 어중간했다. 그 무리 중에 머리 역할을 하던 친구는 지금 경찰인데, 그때 내 뺨을 또 후려갈겨 줬다. 왜 이리도 내 뺨을 때리는 이들이 많은지 허허. 지금 생각해보니 도움이 된 것 같다. 덕분에 친구를 사귈 때는 주의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을 배웠다. 천천히 공부를 해보기 시작했고 반에서 5번째쯤 하던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반에서 앞에서 5등 정도로 시작하였다. 내가 나름은 독한 구석도 있는 것 같다. 그렇게 그 성적을 유지하며 공부하는 이미지를 세워갔고, 좀 놀던 친구들은 더 이상 이런 무리들과 섞이지 않고 그들만의 리그를 구축해 갔다. 나는 공부 잘하는 친구들과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지내려 했고 어중간한 절대다수와 어울리며 어중간한 삶의 표본을 살기 시작했다. 정치, 외교, 군사, 그리고 교육에 골고루 비중을 두며 적당히 pc방도 가고 노래방도 가고, 축구도 적당히 하며 적당한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리고는 수능이 다가왔고, 나는 도망이 가고 싶어 졌다. 호주라는 꿈의 나라로 가보고 싶어 졌다. 수능 없이도 대학을 간다는 그곳이 궁금해졌다. 영어는 어릴 적 파닉스가 다인 나는 아이엘츠라는 거산을 목전에 두고도 겁 없는 하룻강아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