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서두르면 좋았는데, 느적느적 매트에서 발 하나 옮기지 못하네요. 금세 단테 <신곡> 독서 모임이 있어서요. 편지를 쓰다 말고 가봐야 해요.
어젠 비가 내렸어요. 아이랑 길을 걷는데 바스러질 낙엽에게 어찌나 윤이 나는지요. 주머니에 찔러 넣지 못하고 눈에 담았습니다. 길에 보석이 깔린 듯하니 밟기 미안했어요.
여기 메마른 형편을 아시는 걸까요. 땅이 젖을 뿐인데 마음이 촉촉해요. 내일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목도리를 둘러매야겠어요.
어제는 무르 읽기, 오늘은 고전살롱. 새벽에 연달아 모임을 가졌어요. 책을 읽는 시간도 좋지만, 책 읽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합니다. 신체 나이를 떠나 몇 번 즘은 생을 거친 듯한 사람을 만날 때면 특히 더해요.
책을 읽거나, 읽지 않거나 이 몸으로의 삶은 이번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지요. 출근하고 퇴근하면 밥을 하고 보니 틈틈이 읽어야 해요. 그 동기와 목적이 무엇일까, 궁금해요. 마음의 양식이니, 빤한 이야기 말고 솔직한 제 이야길 듣고 싶어요.
20대엔 삶의 재료를 얻고자 했어요. 긴 터널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 지금과는 또 다릅니다. 온갖 상념의 갈피에 휘말리는 기분이랄까요. 먼저 '나'를 몰랐으니 '남'을 알 수 없고요. 낯선 세상을 떡하니 규정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나'와 '남'을 그리고, 세상을 고정하고자 책을 구했어요.
우리 행동에는 내적 동기와 외적 동기가 있다고 해요. 내적 동기라 함은 말 그대로 내 안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스스로 우러나오는 거예요. 외적 동기는 쉽게 말해 보상에 따라 움직이는 건데요. 대표적으로 월급이 그렇고, 심부름이나 칭찬 스티커가 그렇지요.
20대에 이따금 서점에 들르거나 책을 구했던 데엔 외적 동기가 컸어요. 무언갈 얻으려는 마음이요. 물론 순수하게 책 그 자체를 즐긴 적이 아주 없다고는 못하겠어요. 주로 손이 갔던 것은 실용 서적, 자기 계발이에요.
이제 30대 끝인데요. 지난 10 년간 삶의 2막, 또는 3막을 지났을까요. 정말은 그곳을 벗어나야 바닥과 천장까지 훤히 볼 수 있잖아요. 40대를 넘나들 때에 지금을 다시 정의 내릴 수 있을 거예요. 분명한 것은 20대와는 명면이 다르다는 겁니다.
지금의 독서는 '나'를 향할 때가 많습니다. 여전히 남을 바꾸고 세상을 움직이려는 의도가 있을지 몰라요. 단지 무엇도 얻지 못했다며 억울하거나 불안하지 않습니다. 바람이 줄었어요. 느닷없이 눈이 젖거든 마음 놓고 웁니다. 책이 책을 부르고, 읽는 행위만으로 가치를 느껴요.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여러 번을 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 책을 통해 경험하는 거예요. 지금 나이와 무관하게도 새로 나고 새로 죽는 거예요. 최근에는 심장외과 전문의 책을 읽었는데요. 한동안 그와 함께 수술실에 들어가 심장을 열고 매만졌습니다.
창을 열고 청소하려고 해요. 그다음은 딸이랑 책을 읽으렵니다. <피, 인생의 지문>은 오후에 서평 남길게요.
따듯한 일요일 보내시길.^^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