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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히 Oct 26. 2018

가을비

2018.10.26

가을, 비. '가을비'라는 명사가 있는지 포털사이트에 단어를 검색해본다. 있다. '가을에 오는 비'. 어린 시절 배웠던 대한민국의 기후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뚜렷한 4계절을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배웠는데 이젠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스치듯 지나는 봄과 지겨움을 동반하는 여름, 언제 왔는지도 모르는 가을과 포근해지는 겨울. 계절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지는 마당에 맞이하는 가을비라니, 이토록 센치한 금요일 아침이 어디 있겠는가.


정말 일하기 싫은 날이면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라도 와장창 쏟아져서 두 시간쯤 사무실에 정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실제로 사무실에 전기가 나가 아무런 일도 못했던 때가 두어 번 있었는데, 컴퓨터뿐만 아니라 전등 같은 것들도 모두 나가버리기 때문에 사무실은 강제적인 고요함에 빠져들곤 한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스마트폰이 있던 시절도 아니었거니와, mp3 기능을 제공하는 폰이라고 해도 그 기능을 200% 활용하는 사람이 없어서 적막한 고요 속을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그럴 때 튀어나오는 것이 바로 '게임'. 가령 침묵의 007이라는 게임이나 마피아 같은 게임을 하고 있노라면 날씨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그 느낌에 무한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막 막상 기획자가 되고 보니, 컴퓨터의 유무에 관계없이 일을 할 수 있었다. 생각이라는 것은, 아이디어라는 것은 꼭 컴퓨터로만 작성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손글씨나 그림으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달칵거리는 타이핑보다 집중력이 높아진다고 해야 할까? 평범한 생각에 아날로그 감성이 더해지니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은 늘 나의 몫이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컴퓨터로 업무를 하려고 하는 경향이 좀 있다. 웃긴 건, 그 와중에 아날로그 콘셉트를 찾아간다며 옛날 타자기의 느낌과 소리를 내는 키보드를 구입해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주변 팀원들에게 굉장한 민폐가 될 수 있다. 사운드 장난 아님.)



지난 여름 휴가, 휴가지에서 비를 만났다. @강원도
그냥 지방 다녀오는 길. 비가 너무 심하게 와서 고속도로의 차들이 모두 비상깜빡이를 깜빡..깜빡...
한겨울에 놀러간 제주도에서도 만난 비. 패딩 위에 비옷을 껴입었더니 처질것 같다. @제주도


아침나절이면 멈출 것 같았던 빗줄기가 가늘어진다 싶더니, 점심 먹으러 나가야 하는데 다시 굵어지고, 일하는 시간엔 또 그쳤다가 퇴근할 때가 되니 다시 굵어진다. 뭐 하자는 건가 싶다. 이런 비슷한 패턴에 빡치는 직장인이 나 말고도 많겠지? 오늘은 가을비를 안주삼아 막걸리나 동동주 같은 구수한 술을 들이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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