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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히 Apr 01. 2022

따뜻한 게 좋아서

시작은 소소하게 부산이었습니다만,

이전 직장에서 어설프게 몇 달간 부산에서 근무했던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나고자란 내가 부산에서의 삶이라니, 따뜻한 남쪽 동네라니, 독립이라니! 부푼 꿈으로 반년을 부산에 살면서 말 그대로 어설프게나마 부산의 여러 모습들을 좋아했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뇌리에 강하게 남아 지금의 남편과의 연애에도, 결혼 후의 여행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나는 틈만 나면 부산엘 놀러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고, 매번 비슷한 여행지를 선택하려는 내 앞에서 남편은 차마 싫다는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을 너무나도 좋아했던 철딱서니 없는 나를 보며 '최소한 생일 주간만큼은 그냥 와이프가 원하는 대로 해주자'라는 생각을 했던 것인지, 매년 9월을 전후로 갔던 여행들은 모두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고를 정도로 나는 이기적이었고 남편은 이런 나를 이해해주었다. 그래서 어김없이 2021년 9월의 여행지도 부산으로 결정했다. 한 달 전부터 왕복 KTX 기차표를 특실로 예약해놓고, 수십수백 곳의 숙소를 뒤져가며 가장 마음에 드는 광안리로 숙소를 잡아 3박 4일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우리는 맨날 해운대에서만 놀고먹었다, 라는 남편의 말에 바로 옆이지만 조금 색다르게 즐겨보자는 목적으로 우리는 광안리를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우리가 제주도에서 한달살이를 무심결에 결정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광안리에 도착한 첫 날 밤. 한 잔 두 잔 술잔 속에 사랑을 가득 담아 술자리를 즐기는 걸 좋아했던 우리는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분위기 좋은 숨은 맛집을 찾겠노라 다짐했고, 광안리 뒷골목의 어느 조용한 가게를 찾아 문을 두드렸다. 그렇게 들어간 가게 한 구석자리에서 생소한 술과 익숙한 안주 한 접시를 시켜놓고 마주 앉아 '매번 부산은 지겹지 않으냐'는 이야기를 나누던 찰나였다. 남편이 먼저 운을 떼었다.


"우리 제주도 한달살이 해보지 않을래?"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제주도 여행이라곤 몇 번 가본 게 전부였지만 그곳에서 한 달을 살아보겠다고 생각을 했던 적은 없었다. 길어야 4박 5일짜리 긴 여행이라고만 생각했던 제주도에서 무려 한 달이나 살아본다는 게, 말이 한달살이지 준비해야 하는 건 또 얼마나 많을까. 이 사람, 멀쩡히 다니는 회사는 어떻게 하고 이런 제안을 하는 걸까. 남편의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뇌리를 스치는 수많은 생각들로 멈칫거리는 나를 앞에 두고 남편은 숙소 애플리케이션을 켜며 당장 예약 가능한 제주도 한 달 살기에 적합한 숙소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숙소를 검색한 지 10여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한 곳의 숙소를 골라 내게 스윽 내밀며 보여주었다. 이곳이 어떠냐고.


위치와 시설과 후기를 나름 꼼꼼히 검토하며 빠르게 골라낸 숙소를 보며, 내가 제일 먼저 확인했던 것은 금액이었다. 제주도에서 이름 좀 날린다는 숙소들은 1박에 몇십만 원도 넘는다는데 하물며 한 달이면 얼마나 비쌀까 걱정했던 내 눈앞에 보여진 금액은 '이 금액대가 넘어가면 비싸니까 안된다고 해야지'라고 생각했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딱 내 생각의 마지노선에 걸쳐져 있었다. 이 금액 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걸 어떻게 알았지? 이래서 같이 산 세월 무시 못한다는 거구나, 남편은 이미 내 머릿속을 꿰고 있구나, 하며 놀라는 것도 잠시였다. 적당한 술, 제대로 무드에 시동 걸린 분위기가 더해졌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단박에 남편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곧이어 항공사 앱을 실행시켜 항공편을 검색했고, 비행기 티켓도 그 자리에서 바로 예약해버리고 말았다. 우리의 제주도 한 달 살기는 광안리 뒷골목의 어느 술집에서,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던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다.


남은 건 남편의 한 달 휴가를 어떻게 받아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미 진작에 회사를 그만둔 나는 일정을 조율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남편은 한 회사의 팀장으로 재직 중인 참이라 한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우는 게 쉽지는 않을 터였다. 걱정에 걱정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지만 '나만 믿으라'는 남편의 말을 철석같이 믿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기분 좋은 술자리를 마쳤고, 후일담이지만 아마도 그날 밤 밤톨이가 우리에게 찾아왔던 것 같다.


10년이 넘는 직장생활, 5년이 넘어가는 결혼생활을 보내며 꿈만 꾸던 소소한 일탈을 단행한 부부. 회사를 그만두었고, 한달짜리 휴가를 얻어내 마침내 제주도 한달살이를 경험해보는 제주도 초짜인 부부의 이야기. 아무런 계획도 준비도 없이 무작정 예약한 비행기 왕복티켓과 숙소예약으로 시작된 우리의 소소한 제주 한달살이는 과연 어떻게 펼쳐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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