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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히 Apr 18. 2022

일주일의 길이

일월화수목금토

제주도 우리의 숙소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흘렀다. 빠르기도 하고 느리기도 했던 일주일 동안 단 한 글자의 글도 적지 않았다. 우리는 지난 일주일 동안 시간의 속박이 없다는 게 어떤 건지를 온몸으로 체감하며 그동안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거리가 멀어서 오래 걸린다는 이유로 둘러보지 않았던 곳들을 돌아다녔다. 굳이 제주도까지 와서 왜 이런델 가지 싶은 곳도 있었고, 이걸 보려고 제주도에 오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장소도 우리에겐 새로움이었고 즐거움이었으며 지금만 누릴 수 있는 소중한 여유였다.


요즘 유행하는 소위 '지브리스튜디오' 색감의 집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머무는 숙소는 제주도 서쪽 월령리에 위치한 곳으로, 선인장 마을로도 유명한 곳이다. 멕시코 해안에서 떠내려온 선인장 씨앗이 제주도까지 흘러들어 해안가에 백년초 선인장들이 자라기 시작했다는데, 제주도에서는 유일하게 월령리에서만 이 선인장들의 자생지역을 볼 수 있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바다 풍경 말고 다른 그림을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꼭 한 번쯤 추천해 주고 싶은 그런 독특한 뷰를 가진 낭만적인 바다가 있다 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보로 5분 여가 걸린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그 멋진 해변길을 제대로 걸어보지 않았다. 우리에겐 아직 20여 일의 시간이 있어, 그중에 언제라도 바닷길은 걸어볼 수 있으니까 하는 마음이 아직은 더 크기 때문이겠지.


이번 제주 한달살이를 오기 전에 제주도에 가장 오래 머물렀던 기간은 몇 년 전, 느지막한 여름휴가로 왔던 5박 6일짜리 여행이었던 것 같다. 그 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즈음이었는데 꽤나 큰 규모로 제주도를 태풍의 바다 한가운데로 몰아붙였던 강력한 태풍이 지나가던 시기였다. 휴가를 목전에 두고 당장 모레부터 태풍이 제주도를 덮친다는 말에 휴가 일정을 급히 하루 더 마련해서 태풍이 오기 하루 전날 부랴부랴 제주도에 왔더랬다. 예약된 숙소도 없이 급히 숙소 어플로 하룻밤 묵을 방을 찾고, 빗속을 건너 치킨 한 마리와 맥주 몇 캔에 '여행은 이런 맛에 오는 거지' 라며 나름의 나만을 즐겼던 때가 있었다. 여행 날씨운이 특히 없었던 우리는 그래도 태풍보다 하루 일찍이라도 도착할 수 있다는 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거친 비바람 속에서 한 자락 우비를 흩날리는 여름휴가를 보냈었다. 그에 비하면 이번 한 달짜리 여행은 날씨의 운을 바라지 않아도 되고, 춥거나 더울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아주 만족스러운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일주일을 돌아보면 사실 날씨 운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었다. 하늘은 예쁜 구름이 송송 떠다녔고, 햇빛은 화창했으며, 낮엔 따듯하고 저녁엔 시원한 날들이 이어졌다. 맑고 화창한 날씨 탓에 시간 걱정 없이 매일매일 색다른 곳과 새로운 곳을 돌아다니며 여행의 서막을 알리기에 바빴다. 핸드폰에는 지난 일주일간 찍은 수백 장의 사진들로 금방 앨범이 넘쳐났고, SNS에는 사람들의 좋아요와 하트가 꾸준히 늘어났다. 8할은 쾌청한 날씨 덕분이었고, 2할은 시간을 아끼지 않은 것에 대한 보답의 느낌이었다. 지난 제주 여행들을 돌아봤을 때 우린 너무나도 짧은 시간에 늘 쫓김을 당해야 했고,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이어지는 스케줄에 고된 몸을 달래며 휴가가 끝난 이후에는 고갈된 체력으로 며칠을 버텨야 했다. 하지만 이번은 분명히 달랐다.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고 그만큼 시간도 더디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았다. 우린 시간이 많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10년이 훌쩍 지나버린 두 어른이들에게 한 달이라는 여백에는 너무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중 일주일을 별다른 이벤트 없이, 계획 없이, 두서없이 흘려보냈지만 이 또한 우리의 제주 생활을 마주하는 한 방법이라는 생각에 지나버린 시간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새삼 이렇게 다르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서로 다른 일곱 개의 날짜들과 요일들이 자연스럽게 지나가며 우리도 그 시간 속에서 조금은 제주도에 스며들었기를, 조금의 아쉬움도 남기지 않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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