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히 Feb 22. 2017

좋은 선임 vs 나쁜 선임

당신은 어떤 타입의 선임입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해 보세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흔히 사회생활을 이야기하면서 '또라이 불변의 법칙'을 얘기하곤 한다. 어떤 조직이든 조직 내에 무조건 1명 이상의 또라이가 있다는 법칙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조직에는 그런 또라이가 없다 싶으면 스스로가 또라이라고. 물론 웃자고 한 얘기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오늘은 직장 내 있는 천사와 악마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회사, 그곳에 악마는 없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10년간 6개의 회사를 다녔다. 물론 이중에의 60%는 업무나 회사 분위기가 나와 맞지 않아 그만둔 케이스이다. 대학을 졸업하자 입사한 첫 번째 회사는 전공과 직결되어 있는 건축회사였다. 그중에서도 도면 컬러링 작업이라 불리는 업무를 담당하는 팀에 배정되었었다. 당시 내 나이는 22살. 사회생활이고 나발이고 쥐뿔도 모르던 때였다. 당시의 선임은 28~29살 정도 되는 여자 대리였는데, 이름이나 연락처 같은 건 남아있지 않지만 굉장히 카리스마 넘치는 바람에 뭔가를 더 배우고 싶은 생각이 드는 선임이었다. 그녀는 천사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었다. 인간이었다. (응?) 말인즉슨,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는 개념이 확실했다는 말이다. 일로써 잘못한 게 있으면 호되게 꾸짖고, 실수한 게 있으면 바로잡아주고, 모르는 게 있으면 친절히 가르쳐줬다. (잘못한 것과 실수한 것과 모르는것는 천지차이다.) 일에 있어서는 꼼꼼하고 깐깐하고 명확했지만 사람으로서 만난 선임은 천생 여자였다. 예쁘고 맛있는 음식이나 소품을 탐하고 문화 즐기는 걸 좋아하는 여느 20대 후반의 여성과 다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의 모든 직장생활을 다 까뒤집어도 그렇게 같이 일하기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리라. 


하지만 서두에 얘기한 '또라이 불변의 법칙'이 있다. 당시 내가 속한 조직의 또라이는 더 높은 사람이었다. 30대 중후반이었던 그분은 업무지시를 명확하게 하지 않았고, 검토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업무와는 무관한 인신공격성 멘트를 수시로 날려 나의 여린 마음에 상처가 가실 날이 없었다. 오죽하면 내가 좋아했던 직속 선임이 내가 혼나는 모습을 보고 달려와 나를 커버 쳤을까. 그 정도로 그 높은 분이라는 사람은 조직 내에서 유명한 또라이였다. 예상했겠지만, 그런 사람에게서는 배울게 적었다. 사회 초년생이기 때문에 배울 점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상사를 만나는 것 또한 배움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그 상사에게 지칠 대로 지쳐 결국 퇴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일을 잘하고 못하고는 퇴사 기준이 아니었다. 단지 사람이 힘들어서 입사한 지 3개월 만에 사표를 내버렸다. 우리 주변에 이런 상사는 생각보다 흔하다. 사례를 정리해보자면 다음의 8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1. 업무지시를 명확히 내리지 않는다.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는지 본인조차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업무지시)
2. 신입사원과 경력사원을 구분하지 못한다. (사회경력이 없는 신입에게 경력직의 업무능력을 과다요구)
3. 잘못된 업무에 대한 피드백을 제대로 주지 못한다. (잘못과 상관없이 개인적인 감정 조절 부족)
4. 본인의 실수나 잘못을 덮거나 남에게 전가한다. (자신의 치부를 만들지 않기 위해 무리한 업무 이관)
5. 일과 무관한 사담으로 집중을 방해한다. (퇴근 이후의 사생활에 대한 과도한 간섭과 호기심)
6. 일이 아닌 사람을 무시하는 언행을 일삼는다. (이해력이 떨어진다는 등 두리뭉실한 꾸짖음)
7. 간단한 해결책이 있는 문제도 과도하게 부풀린다. (자신의 업무능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술책)
8. 퇴사하고 싶다는 말을 쉽게 던진다. (다른 사람의 업무 열정도 함께 떨어트리는 최악의 멘트)

직장상사 때문에 빡쳐본 사람이라면 위의 8가지 중 몇 가지에 대해 수긍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저 8가지를 동시다발적으로 겪으며 극심한 스트레스에 휘둘려보기까지 했다. 한 번 겪어보면 괜찮아지겠거니 했지만 반복해서 말한다. "또라이는 어느 조직에나 있다!!" 그리고 이 또라이는 생각처럼 쉽게 회사를 때려치지 않는다.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던 세 번째 회사, 드디어 좋은 선임을 만나다.

홍보기획자라는 직업으로 9년간 밥벌이를 해 먹고살 수 있게 해 준 회사가 세 번째 회사였다. 사실 내가 입사를 지원했던 세 번째 회사의 지원업무는 'CG 디자이너'였다. 광고나 홍보영상 등에 들어가는 각종 CG를 제작하는 그런 업무 말이다. 그런데 중소기업의 상황이란 그리 평탄치만은 않은 법이다. 회사에 없던 조직인 '기획팀'이 신설된다는 소식과 함께 나는 말도 한번 제대로 섞어보지 않은 사람과 한 팀을 이루게 되었다. 천만다행이었던 것이 기획팀에서 앞으로 해야 할 주요 업무가 기획안 작성과 프레젠테이션이며 파워포인트 스킬과 디자인 감각과 발표력을 요구하는 업무였다. 글 쓰는 걸 좋아하는 내가, 디자인을 좋아하는 내가, 남들 앞에서 발표할 때 떨지 않는 내가(오히려 약간의 떨림을 즐기기까지 하는) 맡기엔 최적의 업무였다.


비록 실제 업무에서 기획안을 쓰거나 프레젠테이션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당시의 팀장과 대표는 내가 빨리 업무스킬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업무스킬뿐만 아니라 내가 꾸준히 열정을 가질고 업무를 할 수 있도록 인생과 삶에 관한 조언들도 함께 해주었다. 물론 이 조언이라는 것은 사생활 침해라고 생각되는 범위를 넘어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앞으로 함께 헤쳐나가야 할 쉽지 않은 일들에 대한 비전을 심어주고, 그에 관해서 어떤 보상들이 예상되는지를 함께 공유했다. 덕분에는 나는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비전을 가질 수 있었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든든함을 가지고 일을 배워나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좋은 선임인가?

앞서 나쁜 선임의 대표적인 8가지 사례를 적어보았다. 그리고 슬슬 좋은 선임이란 어떤 선임인지에 대한 사례도 같이 적을 때가 됐는데, 적어도 내 생각이나 기준에서 좋은 선임은 단 한 가지로 귀결될 수 있다. 이것만 잘한다면 부하직원이 신입이든 경력이든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어리든 많든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있는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바로 '실행 가능한 비전을 제시하는 선임'이다. 어떻게 보면 추상적인 말일 수도 있고, 너무 무난한 말일 수도 있다. 혹은 반발을 살 수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게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세세하게 따지고 들자면 업무에 유용한 스킬을 잘 알려준다거나 친절하다거나 착하다거나 앞서 얘기한 나쁜 선임의 8가지 사례의 반대되는 좋은 행동을 하는 것이 좋은 선임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선임이라면 누구나 응당 해야 하는 기본적인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마저도 후임에게 제대로 할 수 없다면 후임이 맞먹으려 들어도 할 말이 없어야 하는 게 맞다. 


실행 가능한 비전. 이게 과연 뭘까? 비전이라 함은 단기간의 목표일 수도 있고, 팀이 달성해야 할 운영방안이 될 수도 있으며, 회사가 성장하기 위한 핵심가치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신입사원이라고 생각한다면, 입사한 지 갓 한두 달밖에 안됐는데 어떻게 팀의 운영방안과 회사의 성장과 가치를 논할 수 있겠는가. 이걸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좋은 선임의 힘이다. 지치지 않게 하는 것. 열정을 놓치지 않게 하는 것. 스스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데서 오는 자부심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 알게 하는 것. 모자란 부분을 제대로 채워주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실행 가능한 비전에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나 같은 경우엔 새벽 4시까지 1차, 2차, 3차, 4차까지 따라가고도 다음날 9시에 출근하면서 몸은 비록 힘들었지만 마음은 힘들지 않았다. 1차부터 4차에 이르는 동안 선임들은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로 하면 되는지, 그 모든 걸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나를 설득했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목표 주입이 아니라 철저한 설득이었다. 강요가 아닌 설득에 나는 당연히 동의하게 되었고, 결국 그 비전을 따라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세 차례의 이직을 하고, 그만둔 회사에 다시 찾아가서 채용해달라고도 하고, 갑작스러운 지방발령을 받아보기도 하고, 새롭게 자리 잡은 회사에서 옛 직장동료들과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하면서 나는 이 직업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상황에 따라 직장이 바뀔 순 있지만, 내가 배운 모든 것들이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바라보고 있고 그것이 내가 원하는 나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내가 처음 입사했을 때의 설렘과 비슷한 설렘을 품고 있는 신입직원을 이끌어가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신입직원을 보며 첫 직장생활의 떨림과, 목표와, 초심을 떠올릴 수 있어서 나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바른 생각으로 맡은 바 임무를 잘 해내는 한 명의 '인재'로 거듭날 수 있도록 나도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잘해야 나를 따라오는 부하직원이 잘한다. 내가 바른 길로 가야 나를 따라오는 사람들도 바르게 따라올 것이다. 일 잘하는 신입직원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어떤 사람이든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낼 수 있는 선임, 그런 선임이 바로 가장 좋은 선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요즘 좋은 선임과 나쁜 선임이 신입직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실시간 리얼리티로 겪고 있다. 하하하.

매거진의 이전글 기획자가 왜 디자인을 해야 하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