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잃어버린 O조리극
일단 이번 공연에서 신기하다고 느낀 점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게서 기대하는 전위적 성격이나 반연극성 같은 것들은 거의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언어의 기호적 혼란, 의사소통의 교란, 침묵과 정지의 반복을 통해 나타나는 언어와 행위성 등은 일체 배제되어 있고, 무대에는 마치 오직 두 노인이 가지고 있을 법한 생에 대한 아련함과 미련, 허무와 같은 정동을 나타내는 극적 이미지만이 강조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공연은 제목에 있는 “신구·박근형의”라는 구절에 짙은 방점이 찍힌 공연이다. 베케트의 부조리극이라기보다는, 두 노인의 이야기로 완전히 개변한 공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공연을 보고 나서 드디어 고도의 의미를 깨달았다’와 같은 평가는, 아예 공연을 안 보고 쓴 글이거나 아니면 광고용 멘트일 가능성이 높다.)
2025년 5월 9일부터 25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연극 <신구·박근형의 고도를 기다리며>(오경택 연출)가 상연 중이다. 이 공연은 다음 달부터 7월 말까지 지방을 돌며 전국 순회 공연을 이어갈 예정이다.
홀로 무거운 그의 이름은, 포조
신구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노배우의 열연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감동이 배어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동시에 이번 공연은 아무래도 주연 배우의 체력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에서 상당한 분량을 덜어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로 인하여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가진 특징들은 거의 드러나지 못했다. 대신 포조(김학철 분)만은 예외였던 것이, 축약된 플롯 안에서도 특유의 캐릭터성을 비교적 잘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공연은 의상이나 무대 스타일에 있어서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거의 그대로 베끼듯 참조하고 있다. 다만 포조와 소년을 제외한 나머지 다른 인물들의 캐릭터성에서는 매우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고고(신구 분)’는 마치 버스터 키튼이나 찰리 채플린을 보는 것 같았다. 배우가 카메라 연기를 오래 해왔기 때문인지 몰라도 몸짓 없이 오직 표정만으로 연기하거나 작은 제스처를 사용하는 것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이런 점을 보충하기 위해서인지 ‘디디(박근형 분)’는 몸짓을 의도적으로 더욱 크게 하고 발성도 더욱 쥐어짜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럭키(조달환 분)’의 연기는 그저 평면적인 코미디로만 점철되어 있었는데, 어쩌면 고고와 디디를 뒷받침하는 기능에만 충실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포조’의 표현력이 돋보였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포조는, ‘고고와 디디의 관점을 경유하여 인식하는 객체(object)’로서 관객에게 제시된다. 고고와 디디의 맥락없고 논리가 깨진 대화 너머에서 포조의 캐릭터성은 상연되는 시대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사회적 억압과 모순을 은유하게 된다. 이를테면, 권력을 가진 소인배가 보여주는 비인간적 잔인함은 자본주의 체제가 인간 존재를 물화(物化)하는 현상에 대한 비유로 읽히기도 하며, 자기중심적인 냉혹함은 연대정신과 연민을 상실한 현대 도시 사회의 차가운 건조함을 표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버전의 <고도……>라 하더라도 포조의 속물성이 항상 문제적일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악덕이나 부덕이라 부를 만한 어떤 것이, 우리가 일상적 사건이나 사물에서 느낄 법한 가벼운 존재감으로 희석된 연극적 현전이 바로 포조의 캐릭터성이기 때문이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가지고 있는 빈 기표의 연극성, 규범적으로 정해진 기의와의 관계를 거부하고 바깥으로 탈출하는 기표들로 구성되는 극적 이미지라는 연극성, 그것이 포조의 캐릭터성으로부터 국가 권력이나 거대 자본과 같은 중심 담론의 통치성이 배어있는 얼룩을 표백한다. 포조가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탈중심화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구조 덕분이다. 그래서 <고도……>에서는 포조와 럭키가 드라마의 중심에 위치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포조와 럭키가 무대에 있는 동안 고고와 디디가 배경화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번 공연 <신구‧박근형의……>에서는 포조가 무대에 나와있는 동안, 모든 플롯이 포조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연출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어쩌면 고령에 이른 주연 배우의 체력을 고려하여 관객의 초점을 분산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드는 와중에도 궁금한 점은 계속 늘어만 갔다. 연출은 왜 무대를 비우지 않고 가득 차 있게 만들었을까? 나무는 왜 배경의 자리로 구겨넣어버렸을까? 대사는 왜 이렇게 쉬지 않고 이어지는 걸까? ‘사이(pause)’는 일부러 없애놓은 걸까?
두 노배우, 특히 신구 배우의 연기를 직접 보는 것은 좋은 경험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전혀 기대한 적 없었던 어느 노인의 인생 넋두리를 무대에서 보고 듣게 만드는, 그래서 전혀 부조리하지는 않았던, <신구‧박근형의……>는 그런 연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