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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보이스 오브 햄릿>

햄릿도 필요없는, 배우만 보이는 공연

by 미니고래

햄릿도 필요없는, 배우만 보이는 공연

얼마 전 희곡 텍스트를 분석하는 논문을 쓰는데, 소설과 비평 등을 전공하는 선생님들로부터 ‘기왕이면 최근에 나온 전집보다는 원전 텍스트를 구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말을 들었다. 덕분에 희곡 장르에서는 시와 소설, 비평 등과는 다르게 원전(原典) 텍스트라는 개념이 희박하다는 말을 어떻게든 설명해야만 했다. 시나 소설, 비평 등은 일단 일반적인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에 희곡이라는 텍스트를 들여다 보는 사람은 거의 두 가지 부류의 독자들밖에 없다는 점부터 설명해야 했다. 하나는 연출가와 배우와 드라마투르기 등 공연 관계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연구자들이라고. 그리고 희곡 텍스트는 공연에 올릴 때마다 여기저기 뜯어고치는 텍스트이기 때문에 더더욱 원전 개념을 적용하기 어렵다는 설명까지도 덧붙여야만 했다.


이강백 작가처럼 희곡 텍스트의 원형을 중시하고 강조하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의 희곡 텍스트는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낱낱이 해체되고 재구성되기 마련이다. 특히 연출이 극작을 병행하는 경우에는 ‘텍스트’ 개념 자체가 거의 사라지는데, 이 경우 애초부터 희곡 개념을 거부하고 대본으로 작업해서 공연하는 극작/연출가도 있다. 여기서 ‘대본으로 작업’한다는 것은,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심지어 공연하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대본을 수정하고 또 수정한다는 것을 말한다. 어쨌든 희곡 텍스트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연출가와 배우 등이 모여서 원래 없던 내용을 더하거나 아니면 맥락에 안 맞거나 어색하게 느껴지면 있던 내용을 빼 버리기도 한다. 플롯의 순서를 뒤바꾸기도 하고, 심지어 이번 공연 <보이스 오브 햄릿>에서처럼 원작에서 극히 일부분만 발췌해서 활용되기도 하는 것다. 대놓고 말해서 <햄릿>의 오리지날 텍스트 따위가 지구상에 존재할 것 같은가.



햄릿의 록 콘서트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2025년 5월 16일부터 6월 28일까지 공연 <보이스 오브 햄릿>(박한근 연출)이 상연 중이다. 옥주현, 신성록, 민우혁, 김려원이 각각 출연하는 모노드라마 스타일의 ‘콘서트’이다. 일단 이 작품은 햄릿의 모노드라마, 즉 독백에 의해 진행된다는 점에서 매우 비연극적인 공연(performance)이다. ‘연극적’이라는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사건에 대한 모방적 재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제시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기 때문에, 무대 위 등장인물의 머릿속 생각을 대사로서 말하는 독백은 따라서 그 자체로 매우 ‘비연극적’인 연극 기법이기 때문이다. 공연 <보이스 오브 햄릿>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건을 겪고 나서 결국 죽음에 이른 햄릿의 망령이 무대에 나타나서 관객들에게 자신의 스토리를 기반으로 하는 콘서트로 구성되어 있다.


햄릿 혼자만을 무대 위에 세운다는 설정으로 인하여 ‘레어티스’나 ‘요릭’ 등의 중요한 상징적 인물들, 그리고 유령과 햄릿의 만남 등과 같은 중요한 사건들은 사실상 전부 생략되었다. 대신 무대를 채우는 것은 강렬한 록(Rock) 사운드, 동공을 찔러대는 조명, 배경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영상이다.



키치 & 팝 아트


내가 관람했던 공연은 신성록 배우가 출연하는 차례였다. 공연이 시작되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신성록이 상당히 훌륭한 연기자구나 하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노래와 노래 사이가 짧아서 감정을 표현할 사이가 거의 없는 와중이었음에도, 신성록 배우는 그 좁은 틈 안에서 묵직한 감정을 상당히 짙게 표현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공연의 전체 레퍼토리가 거의 비슷한 톤의 록 장르로 구성되어 있어서, 덕분에 솔직히 말하자면 락커를 연기하는 뮤지컬 배우의 무대라는 느낌이 다분했다. 따라서 배우 개개인의 팬이라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공연이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보이스 오브 햄릿>은 그 자체로는 그다지 재미있는 공연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음악들이 하나같이 텐션이 강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오히려 전체 형태가 오히려 평평하고 밋밋하다는 것이었다. 뭐랄까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강렬하게 지르고 또 질러대다 보니, 오히려 시끄럽기만 하고 되려 지루하다고 느껴진 것이다. 감정의 탄성을 내내 팽팽하게 당겨놓기만 하는 바람에, 오히려 긴장을 느끼는 감각이 무뎌졌던 것이다.


지루함 속에서 공연을 계속 보다가 떠오른 세 번째 생각은 ‘키치’와 ‘팝아트’였다. ‘키치(kitch)’는 가치 있는 예술작품에 대하여 싸구려로 조악하게 만든 생산품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한 용어로, 현대 예술에서는 이른바 고급 문화로 간주되는 어떤 것의 아우라를 걷어내면 남게 되는 어떤 것에 대한 미학적 표현 양식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팝 아트(pop art)’는 대중문화의 이미지나 상품 등을 활용하는 예술 작품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번 공연 <보이스 오브 햄릿>은 럭셔리 원본(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대한 키치(햄릿이 대충 독백하는 간략화시킨 모노드라마)를, 다시 팝 아트(록 뮤직 콘서트)적으로 표현한 무대인 것이다. 원본 <햄릿>이 포함하고 있는 관객들이 머리 아프게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들, 이를테면 다양한 사건들과 플롯, 각각의 인물들이 가진 서사와 가치관과 감정, 그리고 여러 가지 상징과 비유들을 모조리 걷어내고 나서, 제목 그대로 ‘햄릿’만을 남기는 키치-모노드라마를 대강 빚었다. 그리고 나서 그 ‘키치-모노드라마’를 뮤지컬 스타일의 록 음악으로 치환함으로써 팝 아트적인 상품으로 전환한 결과가 <보이스 오브 햄릿>인 것이다.


그래서 공연을 보는 내내 무대 위 인물의 대사나 노래의 가사, 음악 자체에서도 별다른 가치를 발견하기는 힘들었다. 대신 그 덕분에 배우 개인이 뿜어내는 에너지와 매력이 더욱 돋보였던 것 같다. 각 배우들의 팬에게는 추천할 수 있는 공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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