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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유 Metaphor Nov 05. 2023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왜 난해한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일기장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무슨 내용인가?<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무슨 내용인가?

엥?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신세기 에반게리온> 작품의 전개와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매력적인 '캐릭터'로 기대됐던 푸른 왜가리 '아오사기'

  영화의 제목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영미판 제목처럼 <소년과 왜가리>, 혹은 <이상한 세계와 마히토의 모험> 같은 제목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이건 영화의 제목 치고는 꽤나 이상하다.


  음악,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등의 시간·공간 예술에서 제목이란 대중의 흥미를 끌어내기 위한 간판이자 작품의 줄거리를 함축한 문장이기도 하다. 작품들은 저마다 하고 싶은 이야기. 즉, 내러티브가 있다. 영화의 메신저인 감독은 가상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며, 그 내러티브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작품의 종류를 막론하고 내러티브를 제목에서 간단히 드러내버리거나 그 자체를 제목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박하사탕>의 제목이 <세상의 기만으로부터 거꾸로 되감고 있는 당신에게>가 아닌 것처럼, <기생충>의 제목이 <처연한 계급의 실존 앞에서 당신은 어떤 것을 우선 하겠는가?>가 아닌 것처럼, <컨택트(Arrival)>의 제목이 <당신은 결과를 알더라도 같은 선택을 하겠는가? : 사랑의 의미>가 아닌 것처럼, 그리고 최근 개봉하여 이슈가 된 <오펜하이머>의 제목이 <사회적 연쇄반응을 경계하라!>가 아닌 것처럼.


  대부분 영화의 제목은 영화의 핵심적인 내러티브를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직설적인 내러티브란 곧 단순하고 쉬운 질문 한 줄로, 그 한 줄의 명제를 벗어나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원천차단하기 때문이다. 내러티브가 직설적이고 단순할수록 작품은 이해하기 쉽고 친절해지지만, 유치해지고, 가변성을 잃기 쉽다.


  그렇다면 직설적이지 않은, 그러니까 간접적인 내러티브는 어떤 장점을 갖는가? 간접적인 내러티브는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관객들로 하여금 생각의 여지를 준다. 같은 장면을 보고도 각각의 관객이 각각의 경험에 근거하여 서로 다른 감상을 느낄 수 있으며, 함축적인 구성을 통해 적은 전개로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즐비한 사랑노래들에 등장하는 '너' 혹은 '그대' 같은 인물들을 부르는 방법이 '미선' 혹은 '민수'같은 특정 인물의 이름이 아닌 까닭과 비슷하다 할 수 있겠다. 특정 인물의 이름을 부른다면 청자는 노래의 가사에 몰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러티브가 간접적일수록 더욱 많은 상징과 은유를 활용하게 되고,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피로감과 불쾌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작품이 난해해지기 십상이며,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할 가능성 또한 커지게 된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작품이 다각도로 회자되길 바라며, 다양한 방면으로 해석되길 원한다. 때문에 작품에서 등장하는 갈등, 시련, 극복 등의 드라마를 통해 내러티브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며, 이러한 은유적 연출들을 체험하는 동안 우리는 긴가민가하면서도 기필코 어떤 의미를 찾아내고 만다. 제목이란 극단적으로는 간판에 불과하며, 사실 감독에게나 관객에게나 중요한 것은 작품의 내용. 즉, 내러티브다. 영화를 보다 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 제목을 잊는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것들은 반대로 작용한다. 제목에서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다소 거추장스럽고 원대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탓에,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독이 우리에게 무엇을 질문할지, 혹은 제목대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설교하는지를 두 눈 부릅뜨고 찾게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제목은 영화가 끝나고 푸른색 엔딩크레딧과 함께 종영을 깨닫기 전까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감독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통해 우리에게 묻고 싶었던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질문 그 자체를 기존의 관행을 역행하는 방식으로 사용한 점은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겠다.





왜 난해한가?

'스튜디오 지브리'를 상징하는 사이안 계열의 색상이 엔딩크레딧의 바탕에 쓰였다.

  푸른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옆 자리에 앉은 여성이 함께 관람하고 있던 남성에게 "엥?"이라는 탄식을 내뱉는다. 이윽고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로 극장이 가득 채워진다. 이게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모호한 결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곳곳에서 조용한 질문과 설전이 오간다. 극장에 불이 켜졌다는 것은, 더 이상의 남은 장면 없이 영화가 완전히 끝났음을 의미한다. 영화가 끝났을 때 우리는 왜 의문을 가졌으며, 왜 이 영화가 난해하다고 느꼈는가?


  세 가지 측면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는데,

첫 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지브리스럽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 이 영화가 실제로 불친절한 전개를 보여주기 때문이며,

셋째, 이 영화의 등장인물 설정에 감독의 사적 관계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지브리'스럽지 않은 작품?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뽐내는 <이웃집 토토로>, <벼랑 위의 포뇨>, 그리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 (좌, 우, 하단)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지금껏 흥행했던 작품들 대다수는 많은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추억은 방울방울>, <벼랑 위의 포뇨>, <이웃집 토토로>, 그리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팬덤이 미야자키의 작품에 열광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귀여운 캐릭터, 혹은 개성 있고 멋진 캐릭터들이 주인공이 되어 벌어지는 모험 이야기. 소위 굿즈가 나온다면 사고 싶을, 그런 매력적인 캐릭터들 말이다. 지브리의 팬덤은 귀엽고 개성 있는 캐릭터를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하고, 그 영화 자체보다는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에 초점을 두고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말랑말랑한 캐릭터들 덕분에 미야자키의 작품들이 '어른과 아이들이 다 함께 볼 수 있는 귀여운 동화' 정도로 인식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토토로처럼 포근하고 귀여운 조력자도, 포뇨처럼 사랑스러운 존재도, 백마 탄 왕자님 하울도 없다. '와라와라'가 잠깐 등장하기는 하지만 연출의 일부에 불과하며, 신비로운 생김새로 포스터에서 관객들을 압도하며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푸른 왜가리 '아오사기'도 결국 교활하고 못생긴 코주부 아저씨였다. 거기다 주인공 '마히토'는 과묵하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 몰입하기 어렵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의 전개는 일사천리로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기존의 지브리 팬덤이 미야자키의 영화를 소비하는 방식이었던 '귀엽고 따뜻한 동화'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귀엽고 따뜻한 동화', 혹은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의 향연을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그러니까 기존의 방식대로 미야자키의 작품을 소비하던 팬덤의 입장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돌연변이에 가까울 정도로 난해하고 불친절한 작품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불친절한 작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중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고 난 직후, 작품의 메시지나 내러티브에는 충분한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이 영화로써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다분히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상술한 대로 기존의 지브리가 동화처럼 따뜻한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친절히 풀어내주는 쉬운 영화였다면, 이 영화는 다양한 상징과 은유를 통해 등장인물들의 감정과 동기를 숨겨두고, 그들이 부대끼며 일어나는 사건과 선택 혹은 대화 등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관념적이고 작위적인 이야기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마히토가 모험을 떠난 이세계(오피셜 명칭)가 정확히 어떤 세계였는지는 극 중에서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세계에는 왜 특히 새들이 많으며, 키리코는 왜 '와라와라'들을 지키고 새들을 쫓는 일을 하고 있으며, 마히토의 새엄마 나츠코가 아이를 낳기 위해 왜 이세계로 와야만 했는지, 아오사기의 일곱 번째 깃털과, 사흘에 하나씩 열 세 조각을 쌓아 올려야 하는 돌조각의 의미 등. 작품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주인공인 마히토 조차도 그런 것들에 대해 묻지 않는다. 나열한 것들 외에도 수많은 상징과 은유들이 등장하지만, 관객은 작품 내에서 그것들에 대한 부연설명을 단 하나도 획득할 수 없도록 짜여있는 것이다.


  미야자키와 비슷한 세대에서 최근까지 영향력을 드러낸 노장 감독 중에는 '안노 히데아키'가 있는데, 그는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그 신 극장판 시리즈를 진행하며 크고 작은 비판을 받았다. 에반게리온 시리즈가 대중들에게 어려운 작품 또는 난해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방대한 양의 상징과 은유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상술한 대로 상징과 은유는 적절히 사용한다면 작품을 풍부하게 하고 부연 설명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도구가 되지만, 그 빈도나 수가 지나치게 많아지는 순간 관객의 피로와 불쾌감을 유발한다. 관객이 상징에 담긴 의미를 모른다면 어떤 내용에 한해서는 이해조차 할 수 없으며, 그러한 상징들이 핵심적인 전개나 결말에 까지 영향을 준다면 난해하고 불친절한 작품이 되기 십상이다.



3. 감독의 사적 관계가 개입된 작품?

<에반게리온 신 극장판> 시리즈의 결말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캐릭터 '마리'

  예시로 들었던 감독 안노 히데아키는 2021년 <에반게리온 신 극장판> 시리즈의 최종편인 <다카포>를 공개한 뒤, 감독의 사적 관계를 작품에 개입시킨 것도 모자라 그것을 결말부 전개의 핵심적인 장치로 사용한 점에 대해 팬덤의 빈축을 샀다. 예컨대, 감독이 TVA시리즈를 진행하던 1998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배우자 '안노 모요코'를 상징하는 조력자 캐릭터 '마리'를 새로이 등장시켰으며, 해당 캐릭터를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결말부의 전개에 밀접하게 배치했던 점이 그러하다. 이는 안노가 결혼생활을 통해 변화하게 된 가치관을 작품에도 다분히 개입시킨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팬덤의 해석 또한 일치하는 분위기였다. 실제로 TVA 및 구 극장판에서 극의 전개는 다분히 염세적이고 철학/종교적인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것으로 그려졌으나, 신 극장판에서 그의 배우자를 상징하는 캐릭터와 함께 밝은 미래를 그려내는 드라마로 탈바꿈한 것에 대해 많은 팬덤이 실망을 토로한 것. (물론 이 점이 해당 작품이 가진 내러티브의 전부는 아니다.)


  이렇듯 우리는 '영화'라는 것이 감독의 이야기를 직접 체험하는 문화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동시에 그 이야기의 범위가 지나치게 감독의 사적인 감상으로 끌려가게 되면 공감할 수 없는 남의 이야기가 된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돌아오다…“이번 작품의 최종 테마는 ‘친구’” / KBS 2023.10.24.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개봉한 이후, 미야자키와 오랫동안 협업했던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의 인터뷰가 매체에 공개되었다. 스즈키는 해당 인터뷰에서 푸른 왜가리 '아오사기'는 자신을, '큰 할아버지'는 지브리의 창립자이자 동료이기도 한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을, 그리고 '마히토'는 미야자키를 상징하는 캐릭터라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스즈키는 인터뷰에서 이 같은 사실을 공개해선 안 됐다고 생각한다. 감독 개인의 사적 영역에서 일어난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는 관객이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과 현실의 인물들은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 또한 상징과 은유로 점철된 이 작품에서 관객들 스스로 캐릭터에 투영된 상징이나 메시지를 읽어내고 해석하는 즐거움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중에서

  직관적이지 않고 난해한 작품의 전개, 수수께끼같은 상징들과 불친절한 은유들, '지브리스럽지 않은' 요소들과 감독의 사적 관계 개입까지. 영화를 난해하고 불친절하게 만든 요소들은 마치 이 영화가 좋지 않은 작품이라 말하는 낙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스즈키 토시오의 인터뷰를 통해 "사실 캐릭터에는 상징이나 은유 따위는 없고, 그저 미야자키의 주변 인물들을 그려놓은 거야."라고 단정 지어진 감각 또한 없잖아 있으며, 그 탓에 그 이상의 상징이나 내러티브를 더 이상 캐릭터에게 기대할 수는 없는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개인의 욕심이 잔뜩 들어간 타인의 일기장에 지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미야자키가 지금까지의 걸출한 작품들을 통해 반복적이고 일관적으로 이야기해왔던 여러 목소리들과, 그가 바라는 세상의 모습, 그리고 사회적인 퇴역에 가까워진 미야자키가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이 당연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감독의 사적인 관계나 불친절한 전개 등은 부수적인 것이라 봐도 무방하며, 상술한 메시지들이 바로 이 영화의 핵심 주제인 것이다.


  한 명의 관객으로서, 사실 이 영화에 대해 칭찬하고 싶은 부분도, 그리고 해석하고 싶은 부분들도 많지만, 앞서 영화를 관람하는 데 방해가 되었던 여러 걸림돌이 있어 그것들을 매끄럽게 정리하는 데 제약이 있었다. 어쨌거나 그 걸림돌들을 제시하고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를 알아보았으니, 이번에는 애니메이션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라는 삶의 변곡점 앞에서 이 작품에 어떤 질문과 이야기들을 담았는지 면밀히 살펴보도록 하자.




2편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무슨 내용인가? https://brunch.co.kr/@minigoround/26

3편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는 왜 새가 많이 나올까 https://brunch.co.kr/@minigoround/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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