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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유 Metaphor Nov 06. 2023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는 왜 새가 많이 나올까

왜가리, 펠리컨, 앵무새,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


이곳을 벗어나려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결국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펠리컨,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중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기 전에, 그대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자. 당신이 어릴 적 가졌던 꿈은 무엇인가? 왜 그 꿈을 가슴속 고이 간직하게 되었는가? 아니, 어쩌면, 지금은 그 꿈이 존재할 수 있는 곳은 당신의 가슴속 외에는 없게 되지는 않았는가? 언젠가 되고 말 것이라 다짐했던 자신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는 채는 아닌가? 당신은 무엇을 위해 달려가고 있나? 아니, 당신은···. 왜 사는가?



1. 왜가리

청로,  푸른 왜가리
왜가리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야.

  '아오사기'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등장했던 마히토의 조력자 푸른 왜가리는 실존하지 않는 환수의 형상을 하고 있다. 거대한 왜가리 주제에 말을 하고, 사람과 같은 이빨을 지녔으며, 그 베일에 싸인 입 속에는 여지없이 못생긴 코주부 중년의 얼굴이 들어있다. 사족이지만 푸른 왜가리(청로), '아오사기'는 실존하는 새의 학명이며, 우리에게는 백로로 흔히 알려진 새다. 울음소리가 가히 천박해 '으악새'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금석화도속백귀(今昔畵圖續百鬼)에 등장하는 아오사기비(青鷺火), 이집트 신화의 베누 | 좌, 우

  '아오사기'는 친구라는 막역한 존재로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고함과 신비로움, 그리고 부조화와 불쾌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는 미야자키가 '아오사기'를 친구이자 조력자로 묘사함에 앞서 친구라는 관계에 대한 염세와 이중성을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교활하고 감언이설을 일삼지만 신비롭고 아름답기도 한 우리네 인간관계의 진척을 상징하고 있다.


  일본 에도 시대의 토리야마 세키엔(鳥山石燕)이 집필한 요괴 대백과 금석화도속백귀(今昔畵圖續百鬼)에 등장하는 '아오사기비'(青鷺火)는 밤에도 빛나는 깃털과 찬란한 빛깔로 사람들을 홀린다는 괴담이었으나, 실은 그저 야행성인 왜가리의 생리적 특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후문이 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동물은 그 무엇이든 신에 필적하는 입지를 가진 생물이다. 왜가리 '베누'는 물로부터 스스로 태어나는 자로써 초기에 절대신이자 태양신 '라'와 함께 찬양되던 존재였다. '베누'의 울음으로부터 시간의 구분이 생겨났다는 신화를 미루어 볼 때, 작중에서 왜가리가 각 시간선으로 통하는 문이 존재하는 큰 복도의 공간을 관리했다는 것은 의도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친구를 상징하는 '아오사기'는 요괴처럼 끔찍하고 불쾌한 존재이자, 찬양될 정도로 신화적이며 고고한 존재. 매력적이고 신비로우면서도 언젠가는 끔찍하고 불쾌한 내면을 마주하고 마는, 그러면서도 서로에게 주고받은 상처로 말미암아 다음의 단계로 나아가고야 마는 우리네 인간관계의 등락을 함축하고 있는 존재로 볼 수 있다. 미야자키는 왜 그토록 '친구'를 전지적이고 신화적인 존재로 묘사했을까? 그건 아마도 그 존재의 불확실성과 두려움이 혼재된 떨림. 그 떨림만이 우리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이들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본 것이리라.


  그리고 '아오사기'는 작중에 등장하는 새 중에서 유일하게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존재다.




2. 펠리컨

펠리컨,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중에서
소년이여.
어서 그 쇳덩이로 내 숨통을 끊도록 해라.


  펠리컨들은 새 생명으로 태어날 '와라와라'들을 가차 없이 잡아먹는다. 마히토가 그들을 내쫓으려 고함을 쳐보지만 역부족이다. 히미의 도움으로 겨우 펠리컨들을 쫓아냈지만, 잠결에 불현듯 마당에서 들리는 기괴한 소음. 소음을 쫓아 마당으로 나간 마히토는 이윽고 추락해 죽어가는 펠리컨을 마주하게 된다.


  마치 병든 것처럼 피 흘리는 펠리컨을 발견한 마히토는 고함치기 시작한다.


왜 '와라와라'들을 잡아먹는 거지?

- 어쩔 수 없었다. 

- 우리들은 이곳을 벗어나려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결국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세상의 끝까지 날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 어린 새들은 이제 나는 법 까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 ···그러니 소년이여, 어서 그 쇳덩이로 내 숨통을 끊도록 해라.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한 곳으로 알려진 예루살렘의 유적 '세나클(Cenacle)'의 기둥

  중세 유럽, 그러니까 성경 제창 당시 펠리컨은 성스러운 상징이었다. 펠리컨은 자식이 굶는다면 그 자신의 가슴을 뜯어내어 새끼들을 먹여 살렸을 정도로 헌신적인 부모의 상징이며, 그로 인해 예수를 상징하기도 했다.


  작중, 상처 입은 펠리컨은 마히토가 채 결단을 하기도 전에, 스스로 숨을 거두고 만다. 펠리컨들이 새 생명이 될 예정으로 하늘 높이 날아오르던 '와라와라'들을 잡아먹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일까?


  우리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저마다의 방법으로 세계를 만들며 살아왔다. 어느새, 우리의 꿈은 빛을 잃었고, 우리는 그저 살기 위해 일상을 버텨낸다. 갖은 부조리에 익숙해지고, 더 쉽고 편한 곳으로의 발돋움을 애써 외면하지 못한 채. 그렇게 우리의 꿈은 '꿈'이라는 고유명사 속에 갇히게 되고, 이내 한 때 존재했던 비열한 진의로 둔갑한다. 자식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혹은 자신이 배부르기 위해. 때로는 젊은 생명들의 소탈한 하루와, 그들에게서 이어져가던 일상의 흐름을 완전히 강탈한 채, 그들을 짓밟고 올라선다.


  당신이 어릴 적 가졌던 꿈은 무엇인가? 왜 그 꿈을 가슴속 고이 간직하게 되었는가? 아니, 어쩌면, 지금은 그 꿈이 존재할 수 있는 곳은 당신의 가슴속 외에는 없게 되지는 않았는가? 언젠가 되고 말 것이라 다짐했던 자신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는 채는 아닌가? 당신은 무엇을 위해 달려가고 있나?


  마히토는 스러져간 펠리컨의 시체를 향해 애도하곤, 그를 고이 묻어준다. 미야자키는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 그대들에게 만들어 준 부조리한 이 세계. 그리고 그 세계를 만드는 데 일조했던 기성세대 중 한 명으로써, 우리에게 낱낱이 그 죄목들을 속죄하고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펠리컨들은 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3. 앵무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등장하는 앵무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의 돼지(아버지) | 좌, 우

  작품이 중반부에 들어서자, 어떤 새 같이 생긴 야만인들이 등장한다. 날개가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새는 새일 터인데, 무슨 새지? 한참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윽고, 그들의 대장인 붉은 새를 향해 누군가 외친다. "앵무새 대왕님!"


  작중에서 앵무새들은 무리 생활을 하며, 이세계에 도착한 마히토를 납치하여 만찬을 즐기려 했다. 그들은 아둔해 보이고, 먹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며, 붉은 앵무새 대왕을 추종하는 집단세력으로 묘사된다.


  잘 알겠지만, 앵무새는 남의 말을 따라 하는 새다. 남의 말을 따라 할 뿐인 앵무새가 집단으로 모여있다는 것은, 곧 수많은 자아가 그저 다른 자아의 말을 따라 할 뿐이라는 이야기다. 집단주의와 탈개인화. 오늘날의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남들을 따라 하지 않으면 이상한 것으로 여겨지는, 남들이 하는 것은 나도 따라 해야만 하는. 앵무새들은 서로의 생김새마저 개성 없이 하나 같으며, 조촐하게 깃털의 색 정도만 달리 뽐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앵무새들의 코가 이상하다. 어째서 조류일 터인 앵무새들의 코가 돼지를 닮았는지 모를 일이다.


'히미'를 납치하는 '앵무새 대왕'


  앵무새들은 'VIIA DUCH' (Viva Duce)라는 문구를 빨간색으로 휘갈긴 팻말을 들고 붉은 앵무새 대왕을 찬양한다. 도중에 다른 소신을 가진 앵무새는 없다. 미야자키는 직설적일지라도 그토록 공격적으로 파시즘과 군국주의를 비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앵무새들은 그렇게 단 한 번도 날지 않다가, 마히토가 있는 다른 세상을 통과하고 나서야 진정한 앵무새의 모습으로 탈바꿈하며, 기쁨에 하얀색 똥을 지리며, 자유롭게 날아오른다. 세계관에 따르면, 그들은 문을 통과하고 앵무새로 변하며 이전 세계의 기억은 즉시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다른 새들을 따라 하며 날아오르지 못했던 시절의 일은 까마득히 잊은 채, 각각의 세계를 통해 활기차게도 날아갔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날개가 있지 않았던가? 어쩌면 저 앵무새나 펠리컨들처럼, 날개가 있으면서도 날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리뷰, 끝.


1편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왜 난해한가? https://brunch.co.kr/@minigoround/25

2편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무슨 내용인가? https://brunch.co.kr/@minigoround/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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