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력의 배분에 실패한 이들
쿵, 쿵, 쿵.
느긋한 듯 서두르지 않는 발소리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발소리는 낡은 목재 계단과 함께 삐걱거리며 층계를 오른다. 드르륵. 이윽고 중문이 열리며 합성 섬유 소재의 겨울외투가 부산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어른이다. 어른이 집에 돌아왔다. 힘세고 강한 존재. 수익을 창출하고, 무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바쁜 존재. 아침에 사라졌다가 밤에 소리 소문 없이 돌아오는 존재. 집에 있는 둥 마는 둥, 잠시도 시간을 게을리 흘려보낸 적 없는 존재. 한 번 분노한다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존재. 혀 끝을 숨기지 않는 존재. 힘을 구사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는 존재.
어른이 뭐라고 중얼거리자, 나는 얼른 뛰쳐나가 그에게 공손히 인사한다. 어른은 거구였다. 어른은 회색이었다. 어른은 잘 말려진 장작이었다. 나는 어른이 무서웠다.
그를 통해 세상에 나온 핏덩이인 나는 그에게 복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두려우며, 반항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존재 앞에서도 나는 은근한 어른의 꿈을 꾸었다. 나는 어른인 척했다. 그가 담배를 태우러 나간 사이 국수 면발과 깨진 그릇 등으로 칠갑이 된 거실을 치웠고, 손목에 커터칼을 대고 압력을 가한 채 가만히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어머니의 등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어른인 척하는 것은 기분이 좋았다. 이 녀석 이렇게 어리면서, 어찌 이리 어른 같을까, 하는 말을 들으면 끝내주는 기분이 들었다. 어른이 되는 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다.
공부를 했고, 도전을 했다. 사랑을 했고, 돈을 벌었다. 나는 늘 어른스러운 친구였으며, 어른스러운 학생이었으며, 어른스러운 소년이었다. 어리광 같은 것은 부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덧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라는 감투에 대해 꽤나 얄팍한 잣대를 가진 내 기준에서 보자면 나는 성인일 뿐 어른이 된 것은 아닐 테지만, 어른이 마땅히 감내해야 하는 책임과 꺼내어놓기 어려운 고독 등은 속절없이 주어져있는 채이다.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어른이 되는 순간은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어른스러운 친구였던 나는, 누군가에게 어른스러운 학생이었던 나는. 누군가에게 어른스러운 소년이자 남자였던 나는 이제, 그냥 친구, 그냥 남자, 범부가 된다.
조숙한 이들이 어른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그 어린 시절, 이미 모든 것을 다 쏟아내 버렸기 때문이다. 총성과 동시에 전력질주해 버린 마라토너가 여유로운 페이스를 다시 찾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는 숨이 차고, 어딘가 불안해 보이며, 또한 부자연스럽다.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아야 할 때도 여전히 그것을 갈구하며, 사랑받는 것을 포기해야 할 때도 여전히 사랑을 갈구한다.
그렇다면 내 안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이미 전력질주해 버린 마라토너, 그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완주가 목표라면, 그는 걷거나 아예 멈춰야 할 것이다. 여유롭게 출발한 다른 이들이 나를 앞서 나가는 것을 두 눈 뜨고 지켜보면서, 조급함에 다시금 차오르는 심박을 애써 짓누르면서 말이다. 충분히 헐떡거렸다면 다시 뜀박질 쳐 나가야 한다. 그렇지만 내가 멈춰있는 동안 앞서나간 이들을 붙잡을 수는 없다. 그들을 붙잡으려면 종전의 전력질주보다 몇 배는 무리해야 할 것이다. 결국 완주는 나 자신과의 레이스가 된다. 누구도 그것을 지켜봐 주지 않을 것이다.
어른이 되기를 주저하는 것. 정확히는 어떤 어른이 될 것인지 고민하는 일. 우리가 그것을 주저하는 이유는 함께 이 길에 올라있는 다른 이들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앞서 나가는 이를 본다면 좌절할 텐가. 그렇다고 나보다 뒤처진 이를 돌아보며 환희할 일도 아니잖은가.
모든 것의 시작은 거기에 있다. 학문, 과학, 통계···. 모든 것은 삶의 시작점. 즉, 유년기를 가리킨다. 그때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것들은 무덤자리를 파고 삐걱거리는 목재 관 뚜껑을 닫을 때까지 절대로 여미어 지지 않는다. 동력의 배분에 실패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정도다. 그것들을 이겨내고 극복하며 사는 것 자체를 삶의 의미로 삼던지, 그렇지 않으면 유년기의 불우를 받아들이고 더 이상의 뜀박질을 멈추던지.
마치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그야말로 맹수에게서 도망치는 뜀박질이 아닐 수 없다. 맹수에게 뒤를 잡히는 것이 선택지가 될 수 없듯이. 그 커다란 아가리에 집어삼켜지는 순간, 여행은 끝나고 더 이상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수년 전 그 아가리에 집어삼켜진 내 형은 아직도 자신이 만들어낸 임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두텁고 커다란 정신과 약 봉투에 그 찬란했을 밤을 통째로 내어주고 간신히 내일을 받아낸다.
마라토너는 아마 앞서나간 이들과의 격차를 좁힐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뒤따라오는 뒤쳐진 이들이 있기사 하겠지만, 그것이 위안이 되지는 않을 터이다. 그는 단지 자신과의 문답 안에 갇힌 채, 하염없이 공도를 홀로 달릴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미안하다. 글을 읽는 당신이 누구든 내가 대신 사과의 말을 전한다. 미안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 밖에는 없다. 미안하지만, 내가 그렇게 정한 게 아니라, 삶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가만히 그것을 받아들이자. 그것을 애써 부정하지는 말자.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다시 한 번 나를 진단하고, 그렇게 계속해서 뛰어나가자. 그것 밖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