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이 좋은 어른 같지?
애들도 잘 따르고
뭐, 나름 대화도 잘 통하니까.
근데 그 애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 드라마 [소년심판] 중에서
굴보쌈에 소주잔을 기울인다. 상대는 없다. 애써 마련한 거실의 풍경. 넓고 허연 식탁의 맞은편에 누군가 앉은 적은 없다. 술이란 어른의 취미다. 하지만 술은 아이도 마실 수는 있다. 술이 어른의 취미가 되는 순간은 술잔을 내려놓을 때다. 취기가 오르던 어느 때, 나는 불현듯 벌떡 일어나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시작한다. 좋은 어른이란 뭘까. 나는 여태 좋은 어른이 되려 기를 쓰고 살아왔는데, 어째서 내 맞은 편의 자리는 비워둔 채 소주잔을 기울였던가. 니체는 우리더러 좋은 어른이 돼라 한 적 없다. 그는 다만 천진난만한 아이가 돼라 했다. 좋은 어른이란 좋은 삶과 같은 말은 아니었던 듯하다.
나의 유소년기는 인정 욕구가 필경 부족했으므로, 나는 인정받기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인정이란 내 삶을 견인해 주었고, 인정이란 그 부산물로 다양한 성취들을 이루게 했다. 우리를 좋은 어른이라 인정해 주는 것은 누구일까? 다분히 아이들이 떠오른다. 아이들이 좋은 어른이라 여기고 그리 잘 따른다면, 분명 좋은 어른이라 할만하다.
꽃 냄새를 풍기는 귀인을 만나고 며칠 후, 나는 돌연 사직서를 냈다. 향후 나아갈 곳도, 돌아갈 곳도 없는 내가 포기를 결심한 데에는 몇 가지 중차대한 고민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나를 강하게 유혹했던 사항이란, '내가 지금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가'하는 의문이었다. 여기저기서 나를 오라 했다. 한 때 나를 인정해 주었던 곳, 그리고 이제부터 나를 인정해 줄 것이라 밀어를 속삭이는 곳. 여기도, 저기도. 모두 나를 인정해 주겠다 했다. 그런데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없었다. 인정이란 다른 말로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다. 나는 사랑이 필요했다. 그렇게 사랑을 주겠다는 사람들을 좇아 의미 없는 시간들을 허비했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선택은 치욕스러운 결과를 가져온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자는 추풍낙엽처럼 사람들에게 끌려다닌다. 자신이 없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에 좋아 죽고, 그렇기 때문에 다가오는 자그마한 정과 관심에도 목마르고, 그 별 시답잖은 것들을 갖고 싶어 내 모습을 연기하고, 그렇기에 결국 내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것을 그들이 간파하고, 그 모든 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얕잡아 볼 수 있도록 방관하고, 그 모든 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동물에게 먹이를 던져 주듯 얼마나 건조한 관심 조금으로 나를 속 편히도 이용할 수 있는지···.
친구 녀석이 둘째를 낳았다. 갓 인큐베이터를 벗어난 핏덩이가 엄마의 품에 안겨 어딘가로 떠났을 때, 우리는 녀석의 첫째와 거실에서 뒹굴고 있었다. 친구 녀석은 온몸의 기운을 태워가며 아이를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쭈뼛거리며 내가 일어나 아이에게 다가가자, 아이는 방울 눈물을 흘려가며 울음을 터트린다. 보행기인지 뭔지에 갇혀 도망치지도 못하는 몸사위로, 녀석의 발치에 채 가 닿지도 않은 내게서 전력을 다해 벗어나려 혈안이다.
기시감이 든다. 아이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아이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좋은 어른이란, 아이에게 좋은 어른이라 할만하다 했던가. 그 순간, 그렇다면 결국, 좋은 어른이란 아이에게 인정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소름 끼치는 질문에 수렴한다. 아이에게 인정받고 나면, 그래서 좋은 어른이 되고 나면, 그 후는? 결국 다시, 아이들의 인정에 목마른 노예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좋은 어른이 되고자 하는 동기로 적절한 것인가?
노을이 뉘엿뉘엿 지던 오후, 나는 이만 만남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식탁에 홀로 앉아 굴보쌈에 소주잔을 기울인다. 상대는 없다. 애써 마련한 거실의 풍경. 넓고 허연 식탁의 맞은편에 누군가 앉은 적은 없다.
좋은 어른이란 허구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