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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른의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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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유 Metaphor Apr 21. 2024

6. 시간에 갇힌 아이들

얼굴들, 그리고 사랑

가정 폭력으로 상처받은 아이요.
그 아이에서 더 자라지 않아요.
10년? 20년?
그냥 시간만 가는 겁니다, 예.
그 시간에서 그 아이 혼자
갇혀 있는 거라고요.

- 드라마 [소년심판] 중에서



내게는 사람의 얼굴을 읽는 재주가 있다. 받고 자란 사랑이 너무도 충분해 그것들이 표정과 몸짓 밖으로 줄줄 새어 나오는 사람의 얼굴, 왜곡된 사랑을 받아와 그것에 이미 넌더리가 난 사람의 얼굴, 받고 자란 사랑을 원치 않는 방식으로 되갚게 되어 더 이상의 생기나 교태를 잃어버린 사람의 굴, 사랑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성에 차지 않아 늘 철없는 불만을 갖는 사람의 얼굴, 받아온 사랑의 총량이 모자라지만 살아가면서 그 이유를 납득해버리고 만 사람의 얼굴, 그리고 자신이 받고 자란 사랑으로는 남에게 사랑을 베풀기는커녕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에도 모자라다는 사실을 체득해 버린 사람의 얼굴.


얼굴들을 보다 보면 그의 살아온 삶이 보인다. 표정, 행동, 몸짓, 말투. 사람의 모습.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 덩어리가 말을 하고, 움직인다.




살아가다 보면, 간혹 힘든 시기가 찾아오곤 한다. 매일 챙겨 먹던 영양제가 어느 순간 줄어들지 않게 되고, 집 안을 녹음으로 채워주던 화분들이 서서히 시들기 시작하고, 주말에 널어두었던 빨래가 방 안으로 돌아오지 않으며, 거울을 바라본 기억이 희미해지는 그런 날들. 그런 날들은 내가 유지해 오던 것들이 멈추면서 시작된다. 그런 날들이 찾아오면 나는 내가 쓰게 될 유서의 내용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여러 가지 할 말이 사라졌다 피어나기를 반복하지만, 항상 빠지지 않는 문구가 있다. 그건 바로, "친구들아, 너희의 자식들에게 절대 폭력을 휘두르지 말고, 네 자식들에게 받아온 것만큼의 사랑을 다 쏟아내기를 바란다."라는 식의 문장이다. 모의 임사의 순간에서 나는 왜 위와 같은 말을 떠올렸을까. 그리고 왜 그건 여러 번의 생각을 거쳐도 지워지지 않는 걸까.


나의 친부는 게으르고 신경질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수시로 밥상을 뒤엎고, 장에 쌓인 물건들을 팔로 휘저어 떨어트렸다. 고성을 질렀고, 매가 아닌 손을 사용했다. 이따금씩 부엌에서 식칼을 꺼내 들기도 하였는데, 아마 흉기를 휘두를 깜냥 까지는 없었던 듯하다. 유년이 맞이하는 어른의 폭력이란 파도치는 바다 한가운데 내던져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속으로는 그의 분노가 빨리 잠잠해지기를 바라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기도와 약간의 분노가 있었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그래서 빨리 어른이 되기를 희망한다. 내가 개입할 수 있었더라면, 엄마를 보호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조금 더 크고 힘이 세진다면, 저 아버지의 탈을 쓴 무언가를 제압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이들은 어른스럽게 행동한다. 그리고 어른스럽다는 말을 듣기를 즐긴다. 누군가 어른스럽다고 칭찬해 준다면, 그것은 어른에 한 걸음 더 가까이 왔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년의 자신이 응당 받아야 할 사랑은 까맣게 잊은 채, 비어버린 속을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달리기 시작한다.


아이가 받아야 할 사랑은 사라져 버렸다. 아이의 기억에, 받았던 사랑이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자라, 그때 받지 못했던 사랑의 자리가 비어있음을 뒤늦게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는 다른 누군가에게 그 사랑을 받고자 매달릴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이 사랑받기 위해 자신이 아닌 무언가를 연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는 절망할 것이다. 왜 나의 유년에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았는지 이해해 버리고는, 비관할 것이다.


아이는 그 시간에 멈춰있다. 몸은 그의 아버지처럼 비대하고 커졌지만, 마음은 세상에 나올 때의 그 고사리 손 주먹처럼 조그맣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무엇을 하면 마음이 채워지고, 남들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정답이 없는 고민을 한다. 분석할 수 없는 것을 분석한다. 정답이 없다는 것을 모른 채, 분석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른 채. 그러다 불현듯, 아이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들의 낯빛을 읽는다.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살아온 삶이 보이는구나. 그들의 표정, 행동, 몸짓, 말투. 사람의 모습.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사랑이구나. 사랑 덩어리가 말을 하고, 움직이는 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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