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는 나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는 왜이렇게 좋은 배우자를 만나지 못했을까. 가끔 인스타나 블로그를 보면 정말이지 착한 남편들 전성시대인 것만 같아 놀라곤 한다. ‘아니 세상에 이렇게 좋은 남편들이 많이 존재한다고?’ 믿기 어려울 지경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인스타의 특성상 나쁜 남자에 대해 자랑해 눈살을 찌푸리게 할 이유는 없을테지만, 실제 영상속 남자들은 육아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는지, 즐겁게 같이 장을 보고 요리를 하는지, 아내에게 다정한지, 기념일을 챙기는지, 나는 그저 놀라울 뿐이다. 젊은 남자가 웃는 얼굴로 아이와 눈을 맞추며 유모차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려버린 전적이 있는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풍경들이었다.
세상 모두에게 친절하면서 나에게만 불친절한 남편과 살아온 나로서는 너무나 생소한 모습들이다. 실제로 나는 프로포즈라는걸 받아본적이 없고 기념일날 선물을 받아본적이 없다. 욕만 안해도 다행이었다. 독박 육아 시절에도 니가 하는게 뭐있냐는 얘기를 들었고, 외도를 해도 내탓으로 돌아왔다. 나의 취향 따위, 나의 감정 따위 존중 받아 본적이 없다. 너무 오랜시간을 그렇게 살다보니 시댁에서 나를 세뇌했듯이 남자와 사는일은 대부분 다 그런줄 알았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왜 그렇게 자신을 함부로 취급하는 남자와의 관계를 끝내지 못했냐고 너도 무슨 문제 있는거 아니냐고, 그렇게 산 니 잘못이라고.
변명을 하자면 나는 인생자체가 외로운 사람이다. 중2때부터 암투병하는 엄마를 지켜봐야 했고 아버지와 자주 싸우고 가출을 일삼던 언니 사이에서 내가 마시던 익숙한 공기는 불안이었다. 지금도 기억한다. 언니가 가출했다 잡혀온 날을, 언니는 달라져 있었다. 화장을 하고 귀를 뚫고 이상한 옷을 입고 현관문을 열고 낯설게 들어섰다. 그리고 또 기억한다. 대학생이 된 언니가 자취를 시작했는데 그 보증금을 빼서 남자친구와 달아난 사실을, 오랜 항암치료로 다 빠져버린 머리카락을 가리려 모자를 쓰고 언니를 잡으러 간 엄마는 뛰어가다 그만 하수구에 발이 빠져 발목을 다쳤다고 했다. 그보다 더한 일도 있었다. 언니의 방황이 자신때문임을 인지하지 못한 아버지는 언니가 또 집을 나간 어느날 화를 참지 못하고 찬장 유리를 다 깨버렸다. 바닥에 뒹구는 유리조각들이 빛났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주방이 초라해 보이는 날이었다. 나는 자연히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 아니, 나라도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던 것 같다. 최대한 조용히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나는 사춘기였다. 가끔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하이패츠를 듣는 것으로 알 수 없는, 해결할 수도 없는 슬픔을 달랬다. 그렇다고 평소에 부모님 사이가 험악했던 것은 아니었다. 두 분은 싸울일이 있으면 학교 운동장에 가서 싸웠다고 한다. 비록 술과 사람을 좋아했던 아버지의 친구들에 대한 지나친 호의는 엄마를 못마땅하게 하고, 그 시대의 아버지 답게 딸들에게도 무뚝뚝하고 진지한 대화라고는 해본 기억이 거의 없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나름 부유했고 명절마다 예쁜 드레스를 사입었고, 피아노 리사이틀에 다녔으며, 성능이 훌륭한 오디오와 클래식 LP판이 많았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자신과 닮은 언니의 성취에 관심이 많았고, 언니는 실제로 어린시절까지는 그 기대해 부흥했던 것 같다. 그 시절에 스스로 원해서 일곱 개의 학원을 다닐 정도 였으니. 그러나 과도한 기대 탓이었을까. 언니는 자의식이 생겨날 무렵부터 이미 반항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담스러웠겠지 하고 이해할수 있지만 나도 어렸던 그때는 왜 자신이 누리는걸 감사하지 못할까 하고 원망했던 기억도 있다. 나는 대채로 행복한 아이였다. 솔직히 어떤날은 형편이 어려운 친구집에 갔다가 나는 축복받은 아이구나 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런 나를 시샘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얼굴도 예쁜애가 공부도 잘하는데다 운동까지 잘했으니 말이다. 어떤 친구는 나에게 대놓고 니가 재수없다는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물론 나중에는 절친이 되었지만.
이런 나의 성장 배경이 내 결혼생활에 나쁜 영향을 미쳤을까? 생각해 본적이 있다. 내 안에 어떤 형태로든 남아있던 불안이 두려움으로 나타나고 그것을 남편이 이용했을까? 왠만하면 남편에게 맞춰주고 내 감정은 억압하는 원인이 되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무책임하고 권위적인 남편에게 끌려 무모한 결혼까지 감행하게 되었을까?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성인이 되고 친구들과 가끔 술잔을 기울이며 수다를 많이 떨어 보았지만, 원가정에 상처가 하나도 없는 친구는 없었고 아버지와 특별히 각별했다는 친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금 문제있는 가정에서 자랐어도 행복하고 안정된 가정을 꾸릴수 있는게 아닐까? 그냥 나는 남자를 잘못 만났다고 결론지었다.
물론 결혼 생활의 실패에 완전히 백퍼센트 내 잘못은 없다고 부인하지는 않는다. 나는 남편의 나쁜 행동을 강화했다. 남편의 외도와 폭언과 무례함 사이에서 나는 어이없을만큼 무기력했다.
실제로 어떤 책에서 남자는 말없이 길들여야 한다고, 함부로 취급 받는 것을 못 참는 여자를 존중한다고 쓰여있던걸 본적이 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내 주변에서도 철없고 자기 멋대로 였던 친구가 오히려 착한 남자를 만나 잘사는 경우도 있다. 그 친구에 대해 조금더 좋게 표현하자면 항상 자신이 먼저이고 자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자기가 하고 싶은데로 행동하는 친구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기적이고 제멋대로다 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그녀는 지금 매우 착한 남편을 만나 아주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당연한 걸까?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는 것은 남편이 자신을 감정적으로 휘두를 가능성을 원천봉쇄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원인을 나아게서 찾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큼의 노력에도 되지 않았던 걸 보면 더 이상의 최선은 나를 병들게 할 뿐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냥 남편은 내가 우스웠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낳은 아이들까지도 무시했던 것이다.
나의 이혼 소송은 아직 진행중이다. 남편은 여전히 모함과 비방으로 나를 협박하고 있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라 이제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그러나 시간이 걸릴뿐 반드시 이혼은 될 것이다.
나는 이제 ‘도비 이즈 프리’가 되어, ‘아엠 오벌 더 문’ 의 상태로 갈 것이다.
지난날을 행복한 기억으로 덮어쓰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나오는 대사처럼,
‘난 그때가 잘 기억나지 않아’
‘네가 운이 좋은 거야, 굳이 기억하려 애쓰지 마’
나에게 글을 쓸 동기를 부여해준 아들과 딸에게 감사한다.
이것은 상처 투성이 우리들의 생존기록이며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감싸안은 사랑의 기록이다.
이런 삶도 있다는 것을, 그래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기를, 그러면 좋은날도 온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길 바란다. 자책을 멈추고 자신을 아끼고 보듬기 시작할 때 그날이 조금씩 더 빨리 온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