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by 유나

소송이 시작되자 당연히 남편은 얼마간의 돈을 내게 보내던 것도 멈추었다. 당연히 생활비는 한푼도 주지 않았다. 그나마 자신 덕분에 받게 된 대출의 원리금 상환과 이자 정도는 매달 보내고 있었는데 그것마저 하지 않았다. 아들은 대학생이 되었고 노트북이 더 이상 수리가 불가능할 만큼 고장났으며 전공책값도, 용돈도 필요했다. 나는 아끼던 피아노를 팔고 하나 있던 명품 가방을 팔고 당근에서 수도 없이 물건을 갖다 팔아 생계비에 보탰다. 옷과 지갑, 커피머신과 믹서기까지 내다 팔았다. 그때 딸은 그것도 없이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며 그만 팔라고 나를 말렸는데 나중에 이런 글을 써 나를 울렸다.


엄마의 당근은 슬픈 당근이었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파는게 아닌

자신이 아끼는 물건을

괜찮다 필요없다 되뇌이며 파는 생계형 당근이었다.

그걸 모르는 나는 엄마를 구박했고

엄마의 애장품으로 나의 배고픔을 채웠다.

뒤는게 깨달았을 때

엄마의 옷장은 텅 비어있었고

몰려오는 죄책감과 미안함은 갚을 수가 없었다.

오늘도 엄마는 아끼는 것을 넘어 필요한 것들을 당근한다.

나의 애장품은 팔지 못하개 하며 당신의 필요는 팔아치운다

애달타 미치겠다


나는 문학소녀인 딸의 눈에 비친 당근하는 내 모습을 읽으며 코끝이 찡해졌다.


그러나 언제까지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반드시 좋은 날이 온다며 아이를 달랬다.


그렇게 집안의 물건들을 갖다팔고 한겨울에 입을 패딩 하나 남기지 않고 5만원이라도 벌어보기 위해 애썼지만 나가는 돈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고 나중에는 매달 80만원 이상 드는 병원비와 상담비를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앞이 캄캄했고 자식들을 굶기게 될까봐 무서웠다. 나는 서민금융 진흥원을 통해 제2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았고 동사무소를 통해 긴급 생계비를 지원받았다. 아직 아파트의 절반이 내 명의로 되어있는 상태에서 생계비 지원을 받는일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지만 결국 남편의 오랜 가출과 이혼소송 과정을 들은 직원분께서 신청을 도와 주셨고 나는 3일만에 해당자에 선정되어 160만원이라는 돈을 3개월동안 지원받게 되었다. 친절하게 도와주신 직원분께 지금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그제서야 아기 분유값을 벌기위해 글을 썼다는 공지영 선생님과, 용돈과 책값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마음의 자유를 잃을까 불안할 때가 있다는 피천득 선생님의 말씀이 이해되었다. 나는 아이들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무거나 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피천득 선생님의 이야기가 나온김에 나는 지금부터 남편에 대한 험담을 좀 해보려고 한다. 순수한 어린아이 같았던 피천득 선생님께서도 남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며 남의 말을 해서는 안되다는 사람은 위선자임에 틀림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는 핑계를 대며 말이다. 나는 남편이 비록 외도를 일삼고 어린시절 자신을 돌봐주지 않았던 부모를 자주 원망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의 자녀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길 바랬다. 그것으로 자신도 치유를 받을 수 있을것이라 믿었다. 아이를 존중하면서도 공감해주고 힘들 때 언제든지 털어놓을 수 있는 피난처 같은 아버지가 되어주길 정말이지 간절히 바랬다. 그거면 될 것 같았다. 만약에 시간을 돌려서 남편을 만날지 말지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1초만에 남편을 만나지 않고 돌아설 것이다. 그만큼 내 결혼생활은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면 아이들은?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아이들은 그가 아니어도 내 아이들로 찾아 왔을 것이다. 말이 안된다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나는 일단 남편은 만나지 않고 보겠다. 그는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나쁜 남자였으니까. 남편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말을 잘 걸고 상대와 친해지는 속도가 굉장히 빠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막상 친해지면 거리를 두고 또다른 새로운 사람을 찾았는데 적극적인 시작과 달리 마지막은 거의 도망에 가까웠다. 문제는 이런 사람은 상대에게 마치 자신이 처음 사랑에 빠진것처럼 연기하며 상대방을 특별하다고 칭송하는 등 전개가 빠르기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은 이 사람이 이제야 진짜 사랑을 찾았으며 나와는 다를 것이라고, 나로 인해 변하게 될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익숨해짐과 동시에 불꽃같은 감정은 빠르게 식으며 자신이 필요할때만 연락을 한다거나 약속을 자기 맘대로 변경한다거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고 문제가 생기면 귀찮아 하며 회피하고, 식탐이 유난히 많다거나 뭔가에 중독된 상태를 자주 보인다. 자신의 일에만 관심이 많고 타인의 감정 상태에는 무디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짜쯩을 냈다. 바람둥이 남편은 어느날 진짜 좋아하는 여자를 만났다고 말했다. 그녀는 모 대학의 조교였는데 좋아하는 이유가 특이했다. 옷잘입고 연예인 같아서 좋다는 것이다.


아, 나는 하필 그때 거울을 보았던 것 같다. 거울 속에는 초라한 내모습이 비쳤다. 옷장을 열었다. 화장대를 뒤졌다. 입을 옷도 바를 화장품도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렇게 살면 안되는 거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음날 백화점을 갔다. 성격급한 남편과 살다보니 모든 것을 빨리 결정하고 행동하는 버릇이 생긴 나는 처음 들어간 매장에서 저기 마네킹이 입은대로 주세요 라고 말했다. 입어보지 않아도 되느냐고 묻는 직원의 물음을 뒤로 하고 나는 마치 죄짓는 사람처럼 서둘러 옷을 받아 나왔다. 집에와서야 그것도 몇 일이 지나서야 옷을 꺼내 입어보았다. 예뻣다. 오랜만에 보는 예쁜 내 모습이었다. 나는 다음날 다시 옷을 대충 걸치고 백화점에 갔다. 새 옷을 샀더니 신을 구두도 없고 가방도 없었던 것이다. 새로 산 옷에 어울리는 구두도 사고 가방도 샀다. 3만원짜리 운동화를 벗어던지고 7센치 구두를 신어보었다. 가죽가방을 요리조리 흔들며 들어보았다. 괜히 기분이 좋았다. 몇 번을 그러다 남편에게 들켰다. 남편은 카드 명세서에서 내가 쓴 부분에만 형광팬으로 줄을 그어서 식탁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를 쇼핑 중독으로 몰고갔다.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어차피 죽을거 다쓰고 죽지뭐, 남으면 다 남편 차지 일텐데, 술 값으로밖에 더 나가겠어.’ 그러나 그것은 남편 돈이 아니었다. 친정엄마가 해준 비과세 통장에서 나갈 돈이었다. 살다가 정말 급할 때 쓰라고 말씀하셨지만 지금이 내 인생의 비상상황이니 엄마도 이해하시겠지 라고 나 자신을 설득했다. 그러나 사실 내가 그렇게 쇼핑을 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평생 43kg 이었던 심지어 임신 막달때 몸무게가 51kg 밖에 나가지 않아 산부인과 선생님께 스몰 마더로 불렸던 내가 항우울제 복용으로 살이 8키로그램이나 쪄서 맞는 옷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얘기는 남편에게 하지않았다. 어차피 이해할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남편은 끝끝내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늘 화를 냈으며 공격적이었으며 막말을 일삼았고 그들을 살기싫게 만들었다.


나는 피서영씨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세상에 별로 부러운 사람이 없었는데 피천득 선생님의 따님이신 그분 만큼은 너무나 부러웠다.


아마도 ‘딸에게 성난 얼굴을 하여 보였다가 슬픈표정으로 뒤돌아서 나가 버리는 딸아이를 보고 이보다 더 큰일은 없다며 자신이 정신의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하루 종일 구슬치기를 하였다’는 글을 본 이후부터 였던 것 같다.

이전 09화아이들의 우울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