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3년후 나는 딸의 우울증을 알게 된다. 필라테스를 다녀온 딸아이의 얼굴에 핏기가 없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운동을 하고 오면 바로 샤워를 하던 평소의 루틴과 달리 딸아이는 화장실 앞에서 입을 달싹거리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는 물었다. ‘오늘 많이 힘들었어?’ ‘그럼 그냥 대충하고 집에오지’ 그러나 딸아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언뜻 불안한 예감이 스치며 무슨일이 있었냐고 물었는데 목소리가 이미 떨리고 있었다. 아이는 그제야 작은 목소리로 ‘엄마 미안해’ 하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들에 나도 하얗게 질려 버렸다. 나는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 갔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아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당직 소아과 의사가 없다는 이유였다. 아이는 결국 119를 타고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나는 입안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응급실에서 의사를 만난 아이는 그제서야 털어 놓았다. 진통제를 80알쯤 먹었노라고, 죽고 싶어서 그랬노라고. 아이는 즉시 해독제를 맞는 처치에 들어갔다. 나는 초조한 얼굴로 의사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 집중했다. 응급실은 지나치게 소란 스러웠고, 나는 ‘저 아이가 도대체 왜’라는 의문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의사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입술만 노려보았다. 귀에서 모든 소리가 웅웅거리며 어쩌면 내가 나를 죽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생사가 오가는 응급실에서 그날 나는 하필 죽음을 많이 보았다. 그곳에서 밤을 세며 나는 끝없이 살려달라고 빌고있었다. 퇴원 후 아이는 정신과 상담을 오래 받았고 다섯 번쯤 응급실에 실려갔으며 네 번의 입원을 했다. 네 번째 입원은 첫 번째보다 나에게 더 큰 충격을 안겼는데 1년간 좋아졌다고 너무나 다행이라고 믿고 있을 때 일어난 갑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나는 아이를 2년 넘게 상담해 주시던 교수님께 불려갔는데 아이가 오늘 죽을 결심을 했다고 당장 보호병동에 입원을 시켜야 한다는 말씀이 전해졌다. 아무 준비없이 평소처럼 진료를 갔던 날이었다. 그러나 나는 진료실에서 돌아서 나오며 바로 그 이유를 알수 있었다. 전날 남편의 막말로 딸아이가 울었던 것이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거냐고 한심하다고 부모 그만 이용해먹고 나가서 돈이라도 벌으라고,’ 거기까지만 했어도 차고도 넘쳤을텐데 남편은 그런말을 듣고도 그만히 있는 아이에게 ‘말귀 못알아듣냐, 씨발년아 존나 멍청하네’ 라고 말했고, 아마 그 말들이 한없이 약해진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 있는 아이에게 비수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아이의 입원 절차를 밟고 집으로 돌아와 아이의 병원 생활에 필요한 짐을 챙겼다. 수건과 속옷 화장품과 읽을 책을 챙기며 나는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햇볕이 뜨껍게 내려쬐는 여름의 한복판이었다. 나는 상한 과일처럼 시들어 가고 있었다.
2년뒤 아들도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1년전 누나의 면회를 가서 누나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며 명랑하게 웃고 떠들던 그 아이는 어디로 가고 헬쓱해지고 말수를 잃어가며 우울감을 호소했다. 특히 남자 아이들만 잔뜩 모인 시끄러운 기숙사 생활을 힘들어 했는데, 그래서 우리는 자퇴나 휴학까지도 고려하게 되었다. 진료를 빨리 시작해야했다. 검사결과는 역시나 우울증, 그리고 뜻밖에도 고지능 ADHD까지 진단받게 되었다. 아들은 책을 속독하는, 그러면서도 내용을 다 기억하는 몰입능력을 아주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ADHD라니, 그러나 나는 그런 사실보다 우울증이 더 걱정이 되었다. 아들 또한 자살사고에 시달렸지만, 입원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많이 힘들 땐 학교를 쉬었고 아이의 성적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남편은 이제 조롱과 비난을 넘어 분노의 극에 달했다. 그리고 아들이 새벽 3시에 목을 맨날, 전화로 그 일을 전했을 때 ‘니가 병신같은 것들을 나았네’ 라고 말했다. 뒤에서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 때였던 것 같다. 이제 그만 해야겠다고, 이제 그만 이 결혼생활을 끝내야 겠다고 생각하게 된날이.
그러고 보니 우울증에 처음 걸렸던건 내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15년쯤 전 남편이었다. 무슨 일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아니 이유가 너무 많았으므로, 나는 지뢰를 밟았고 어김없이 폭발했다. 나의 온 얼굴을 할켜 놓고 수습이 되지 않자 남편은 자신이 우울질이라고 자신의 아버지도 그랬으며 자신의 할아버지도 그랬다고 말했다. 그리고 너무나 하찮고 우습게도 원래 왕족들이 허약하며 불안에 시달리며 우울질인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놈에 왕족 타령은 시아버지가 명절때마다, 제사때마다 읊던 레퍼토리 였다. 자신들은 대대로 손이 귀한 왕족이라고 그러니 너는 꼭 아들을 나아 대를 이어야 하며 그 자녀들을 훌륭한 인재로 키워야 한다고, 니가 할 일은 그것밖에 없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였다. 피맺힌 내 얼굴을 눈앞에 두고 이와중에 왕족 타령이라니, 나는 기가막혔지만 내색할수 없었다. 그리고 남편은 각종 중독으로 서서히 분열되어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간신히 받아들이고 정신과를 예약했다. 정신과에서 성격장애, 성중독 진단을 받고 약을 처방해 주었지만 변호사님께 드린 글에 썼듯이 남편은 정신과에서 제대로된 치료를 받지 않았다. 그랬으면서, 자신은 평생 중독상태로 지냈으면서 이제와 나에게 ‘니가 병신같은 것들을 나았네’ 라고 말한 것이다. 값비싼 와인과 위스키, 밥먹듯 갈아치우는 여자 뿐만이 아니었다. 남편은 자신의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강박에 시달렸고 샤워를 하루에 3번씩 했으며 고급 향수를 여러개씩 사서 지나치게 많이 뿌리고 다녔고 나는 몇 번이나 그 냄새에 질식할 것 같았다.
나는 지금부터 왜 남편과 같은 사람과 한집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우울증에 걸리게 되는지를 말하려고 한다. 남편은 모두 내탓으로 돌렸지만 그것은 말도안되는 무식한 소리임을 나는 몇 년에 걸친 상담 과정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 결코 쉬웠던건 아니었다. 나는 다섯분의 정신과 닥터와 세명의 상담사를 거쳐서야 겨우 진실을 말해주는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아주 명료한 어조로 ‘저희 병원에 남편의 외도나 학대로 고통받다가 우울증 걸려 찾아오는 아내분들과 아이들이 많습니다. 죽고 싶은건 죽으라고 해서 죽고 싶은거고 그런식으로 지속적으로 가스라이팅을 당해서 마음이 병든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면 누구라도 아플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제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했다. 내 탓말고 아무것도 할수 없는 상태가 너무 괴로웠던 시간들, 교회에 어려움을 호소하면 회개하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듣던 시간들, 정신을 차려보려고 세수를 다섯 번쯤 해봐도 난 이미 죽은 몸이고 부패하기 시작했다고 생각되던 시간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단한명만 있다면 하고 간절히 바랬던 시간들, 그 시절 삶은 고단하고 죽음의 유혹은 강렬했다. 그런 나에게 당신탓이 아닙니다 라는 말한마디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앗줄 같았다.
먼저 내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전형적인 ‘똑똑하고 착한 아이였다’ 어린 시절엔 엄마가 아팠고, 성인이 됨과 동시에 IMF로 집안이 망해가는걸 지켜봐야 했다. 하나있던 언니는 다혈질에 할 말 하는 성격으로 부모님과 많이 부딪혔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나만이라도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 앨리스 밀러가 쓴 ‘천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드라마’에 나오는 부모의 기대를 빠르게 이해하고 부응하기 위해 애쓰는, 나의 감정보다 부모의 감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아이였다. 이런 나의 가정 환경은 나를 왠만하면 남이 원하는 대로 맞춰주려는 성향으로 자라게 했고, 자기 희생적 태도로 인간관계가 늘 피곤했다. 한마디로 나는 착한아이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이다. 문제를 일으키거나 누군가와 싸워본적이 없었으며, 둘째인데도 책임감이 지나치에 강하고 눈치가 매우 빨랐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철든 아이로 살았지만, 항상 다른 사람의 입장을 먼저 생각한다거나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은 결혼생활안에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 아니었던 남편은 나의 그런 성향을 충분히 이용했고, 지나친 책임감을 요구하는 것으로 나를 지배하려 들었다.
남편에 대해 얘기 하자면 그는 늘 자신이 먼저이고 자신만 특별하다고 믿는 사람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영리하고 재주가 많았으나 부모의 서포트를 받지 못해 망했다고 자주 말했으며, 어느 자리에서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못하면 노골적으로 심술을 부렸다. 당연히 옆에 있는 사람의 감정이나 고통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신을 향한 비난에 과민하게 반응하며 들이 받았고,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남탓만 하며 책임을 회피했다. 어떨때는 자신감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주로 자존감이 많이 낮은 사람처럼 보였다. 자신이 불안하거나 기분이 나쁘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렸으며 원망과 협박을 자주했다. 그리고 대부분 뭔가에 중독된 상태였다. 나는 그런 남편과 살면서 지나친 감정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하게 다른 기준과 판단을 적용했고,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문제를 찾아내 트집을 잡았다. 자신이 하라고 시켜놓고 했다고 뭐라하는 날들이 많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나는 괴로워했다. 나는 오랜 상담을 거쳐서야 그것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특징임을 알게되었지만, 그보다 오랫동안 ‘내가 이상한 건가’라는 자기 의심에 시달려야 했다.
무엇보다 정작 매사에 부정적이었던 남편은 멀쩡한데 밝고 긍정적이었던 아이들과 내가 자살사고에 시달리는 것이 억울하고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되는 상담을 거치며 또 관련된 서적을 읽으며 그 이유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먼저 우울증은 남편이 말하듯 개인적인 나약함이나 악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살 시도를 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크고 해결되지 않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럴 때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주고 지지해 준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 마저 없이 모든 것을 의지의 문제로 몰아가며 나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더욱 극심한 절망감에 시달리게되며 위기를 넘길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남편의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비난과 니가 죽어야 한다는 막말은 내 자신을 짐처럼 느껴지게 했고 극단적인 통제와 무리한 요구 사이에서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실비아 플라스는 결국 죽음을 선택했다.
남편의 외도를 알게되며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라던 그녀는 우울증에 걸렸고 남편과의 별거로 생계문제까지 겹치며 가스 오븐에 머리를 집어넣고 자살했다. 그녀가 죽은 후 남편은 그녀의 글을 모아 출판을 했는데 자살하게 만든 장본인이 위선을 떤다고 비난받았다. 자식들조차 그를 보려고 하지 않았으며 우울증에 시달리며 평생 그를 원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그녀의 남편과 시누이는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이 적힌 그녀의 일기를 의도적으로 없애버렸으며 그는 불륜녀와의 사이에서도 또다른 여자와 바람을 핀다. 다른 여자와의 외도를 알게 된 그녀또한 실비아 플라스와 같은 방법으로 오븐에 머리를 박고 죽어버린다.
버지니아 울프도 끝내 죽음을 선택했다.
그녀의 마지막 편지에서 나는 그녀의 결정을 이해했다.
결국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태로 가고 있었다. 그런 상태도 있는 것이다.
그녀는 어린시절부터 방대한 도서관이 있는 집에서 문학과 철학을 접하며 자랐다. 그러나 13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이복 오빠에게 성폭력을 경험하면서 여러번의 우울증을 겪게 된다. 몰론 그녀의 힘들고 아픈 삶은 그녀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고, 내면의 경험을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로 드러났지만, 그녀를 따라다닌 심한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달아나지는 못했다. 결국 그녀는 돌멩이로 주머니를 가득 채우고 영국의 우즈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극심한 불안과 집중력 상실은 그녀를 더욱 깊은 우울 상태로 몰고 갔고 끔찍한 광기에 시달리며 정신이 다시 붕괴될 것 같다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 그녀는 결국 영원한 끝을 선택 하고 만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남편에게 남긴 편지에서 다른 이유들을 발견했다. 그것은 더 이상 글을 쓸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정신적 압박이었고, 남편에게 짐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걱정이었다. 나는 이토록 좋은 사람들이 겪게 되는 정신적 고통 앞에서 자주 아득해졌다. 정작 이들을 이루말할수 없는 정신적 고통에 빠뜨린 장본인들은 뻔뻔하게 잘만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작품에서 전쟁의 PTSD에 시달리던 세프티머스의 자살소식을 듣고 댈러웨이 부인이 했던 말을 나는 오랫동안 생각했는데, ‘그의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삶을 지키려는 행동” 일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이미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죽음은 자신과 타인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 될 수 도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내가 그 선택이 옳다고 찬성하는건 아니다.
자살의 이해라는 책을 보면 자살을 막는 가장 강력한 요인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나는 특히 이 부분을 여러번 읽으며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다. 먼저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하며 내가 사라지면 그 사람이 슬퍼할거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렇게 누군가와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힘들 때 자신의 이야기를 할수 있다면, 그래서 서로를 구원할 수 있다면 자신도 필요한 사람임을 인식할 수 있게 되고 고통을 말로 표현함으로서 절망이 줄어드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비록 우리가 우울증 환자이지만 대화를 많이 하며 서로의 짐을 나누는 시간을 자주 가졌고 우리는 때로 잠못드는 새벽에 이야기를 나누며 실컷 울었다. 또한 강아지를 데려오면서 돌봐야 할 존재를 마련해 주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자주 나누며 나아지면 할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특히 아이들이 혼자있는 시간을 줄였고 잠도 함께 자며 필요할 때, 충동적인 생각이 들 때 언제든지 고통을 말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주려고 했다. 실제로 나의 경우에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을때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이 사람과 계속 사는한 이 고통이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영원히 지속될거라는 절망감이었다. 그리고 계속 남 탓하는 이를 옆에두면 그럼 내가 사라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네, 라는 생각을 하게 했고,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러나 다행히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살 충동은 영구적인 상태가 아니었고 ‘강한 파도처럼 몰려왔다 사라졌다.’ 우리는 여러번의 위기에서 서로를 구해주었다. 배가 난파되면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조난 신호를 보내야 하듯 우리는 서로에게 구조 대기조가 되었고 서로 붙어 있는 것으로 체온을 유지하며 그 험난한 시간들을 버텼다. 실제로 난파 사고에서 생존률이 높은 사람들은 상황을 빨리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과 협력하며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자주 말했다. 우리는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라고. 너무 행복해서 지금 죽지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기게 되는 날이 올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