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의 딥 컷<4>
“30대 중반부터 나는 여성화가들 이름 앞에 붙는 ‘규수’, ‘여류’라는 호칭에 조금씩 거부감 을 갖게 되었다. 남성의 경우는 ‘화가 OOO’이면 되는데 여성작가는 꼭 여자를 붙이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1983년 7월 2일 일간지 칼럼 中)
화가 최욱경(1940~1985)은 1966년 ‘나는 세 개의 눈을 가졌다’는 글귀가 적힌 작품을 남겼다. 캔버스 위에 종이를 콜라주로 붙이고 잉크로 그린 흑백 작품이다.
그림의 오른쪽 아래에는 ‘3 EYES I DO HAVE’가 적혀있고, 상단엔 조그마한 검은색 점 세 개가 나란히 박혀 있다. 이 점이 눈이라면 아래쪽 줄무늬는 옷과 일그러진 몸일 것이다.
왼쪽에는 자신의 이름을 영어로 쓴 듯한 글귀 ‘WOOK’, ‘KYUNG’, ‘ROOK’이 적혀있다. 그림 속 형체는 그녀 자신인 것처럼 보인다. 최욱경이 가진 세 개의 눈은 무엇일까?
미술사가 진휘연은 이 작품을 두고 “그가 미국에서 외국인 여성이라는 특별한 정체성에 대해 느끼고 관찰하는 과정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고 분석했다.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난 최욱경은 1963년 미국으로 유학한 뒤 평생을 이방인처럼 살았다. 아시아인이자 여성으로, 또 한국에서도 낯선 ‘미국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 여겨졌다.
그에겐 ‘요절한 천재’, ‘엘리트 코스를 밟은 화가’란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교학도서 주식회사’를 창립한 최상윤과 조하진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0세 때 김기창(1914~2001), 박래현(1920~1976) 부부의 화실에서 첫 미술 교육을 받는다. 이후 또 서울예고와 서울 미대를 졸업한 뒤 미국 크랜브룩 대학원 등을 다녔다.
그러나 작품과 기록 속 그녀의 모습은 엘리트보다 고독한 이방인에 가깝다. 그가 자신을 남들이 보지 못한 부조리를 포착하는 ‘세 번째 눈’을 가진 사람으로 표현한 것처럼 말이다.
최욱경이 뉴 멕시코의 로스웰미술관 레지던시에서 작업할 무렵. 그의 친구였던 작가 마이클 애커스(Michael Aakhus)는 그녀가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성’에 맞지 않는다고 자주 농담을 했다고 회고한다.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한국에선 ‘성난 여자’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1966년 ‘성난 여자’를 그린 최욱경은 1971년 이후 국내에 머무를 때도 여성으로서의 주체적 인식에 대해 일간지 기고나 대담을 통해 분명히 밝혀 나갔다.
“이(남존여비) 관습을 고쳐가는 방법은 여자 자신에게 있다고 봅니다. 여성다움을 잃지 않고 자기의 똑똑함을 내세울 수 있어야 어디서든 남녀가 동등한 위치에 서서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여권신장은 헌법을 고쳐야만 되는 것이 아니고 해결점은 우리 여성 자신에게 있습니다.” (최욱경, 조미미, 박미성의 대담, 1979년 2월)
“아직은 유아기적인 상태지만 여자로서의 감성과 체험에서 걸러져 나온, 여성의 의식에 관련된 표상을 창출시켜 직접적으로 구사한 시각적 용어로 표현, 전달하고 싶다.” (‘공간’ 1982년 5월)
그녀를 말하는 또 다른 수식은 ‘추상화가’, 특히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폴록과 로스코, 고르키의 추상이 감정과 무의식을 표현하는 데서 출발했듯, 최욱경도 모더니즘적인 ‘추상’만을 위해 작품을 전개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이 회화라고 말한다.
“나는 내 인생에 대해 끝없는 호기심과 기대를 갖고 그림을 통해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자 한다. 내 그림들은 그러한 추구의 결실이다. 나는 가끔 그림이 창조되는 과정이 내 생활과 꼭 같다고 느낀다.”(여성동아 1982년 3월)
또 그가 처음 미국에 머무르기 시작했던 1960년대는 반전 운동과 페미니즘, 민권 운동 등 다양한 욕망이 충돌했던 시기다. 그는 ‘그림을 위한 그림’에 갇히지 않고 시대적 분위기를 그림 속에 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의 승자는 누구인가?’(1968) 속 인물은 젊은 나이에 사망한 친오빠를 상징한다.
1960년대 추상 회화들에서 최욱경은 강렬한 색채 대비를 통해 공간의 활성화를 시도한다. 그런데 1970년대 말에 이르면 그림 속 형태들이 좀 더 질감이 살아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마치 흐드러진 꽃이나 깃털 같은 형태들이다. 1977년에 그린 대작 ‘생의 환희’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이나 사물에서 내가 순간적으로 느끼는 ‘대상’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마음 속에서 화초처럼 자라기 마련이다. 나는 길을 걷다가도 하찮은 꽃 이파리나 새의 깃털, 부서진 나비 날개 같은 것들을 줍는다. 보잘 것 없는 이 대상들이 나에겐 모두 흥미롭고 신비해 보일 때가 많다. (...) 가령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의 비상에서 내가 환희와 기쁨을 맛보고 사물의 이입을 연상하며 움직임의 연결에서 느끼는 자유스러움. 그것을 나는 환희라고 말하고 싶다.”(여성동아 1980년 3월호)
이 무렵 그는 여의도 아파트를 작업실 겸 집으로 쓰면서 그곳을 ‘무무당’(無無堂)이라 이름 붙였다.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에선 좀처럼 규정할 수 없는 자신과의 괴리에서 오는 허무가 느껴지는 이름이다.
허무를 극복하고자 하는 몸부림은 바로 몸으로 느끼는 감각이었던 것 같다. 꽃잎과 새의 깃털, 그리고 한국의 곳곳을 여행하며 보았던 산과 바다의 모습들을 그녀는 화폭에 담았다. 그러나 1985년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짧은 생을 마감했다.
1972년 최욱경은 시집 ‘낯설은 얼굴들처럼’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 시집에 포함된 시 ‘나의 이름은’에서 그는 자신을 ‘이름 없는 아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독할지언정 스스로에게 솔직했던 그녀의 이야기들은 조금씩 그에 걸맞는 이름을 찾아가고 있다.
“(...)한 때에/나의 이름은/(...)무지개 꿈 쫓다가/‘길 잃은 아이’였습니다./결국은/생활이란 굴레에서/아주 조그마한 채/이름마저 잊어버린 ‘이름 없는 아이’랍니다./나의 이름은/‘이름 없는 아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