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뛰어넘는 인간을 만난 로댕, 그를 보여주는 큐레이팅
전시 큐레이팅은 단순한 작품의 나열이 아니다. 작품을 배열하는 순서는 물론 공간이 주는 분위기, 약간의 가이드를 위한 월 텍스트, 팜플렛 등등 다양한 변수로 관객과 소통해야 한다. 특히 글이나 오디오 가이드로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고 그러려고 해서도 안 된다. 예술 작품은 시각, 청각 등 감각적 이미지로 봐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이나 문자 언어에 의지할 수 없는 큐레이터는 시각 언어를 잘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영국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로댕과 고대 그리스의 예술’전은 뚜렷한 주제 의식에 기반한 큐레이팅이 정확하게 그 의도를 전달하고 있다. 전시는 1881년 마흔 살에 처음 영국 박물관을 방문한 로댕이 파르테논 신전 조각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게 된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전시장에 처음 들어서면 로댕의 아테나 조각이 가장 먼저 관객을 맞는다. 이 조각은 1896년 작품으로 아테나가 머리에 파르테논을 이고 있다. 아테나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지혜의 신이자 조각가의 신. 전시는 파르테논을 머리로 낳고 있는 아테나의 모습으로 로댕의 창조적 과정을 비유한다.
로댕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키스'가 그저 그런 전시에 놓였다면. 아마 수많은 사람들이 피상적 이미지나 이야기를 통해 접한 로맨틱한 이야기. 작품 외부에 놓여 있는 가십성, 신변잡기성 이야기와 함께 작품이 전시가 됐을 것이다. 그러면 그 전시에 온 관객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머릿 속에 남기고 작품 고유의 아름다움과 그것과 나와의 만남은 절대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영국박물관의 큐레이터는 파르테논 신전의 동쪽 페디먼트에 있던 여신 군상과 키스를 함께 전시하길 택했다. 서로의 몸에 기대고 있는 에로틱한 포즈의 유사성을 통해 큐레이터는 로댕의 유명한 키스가 파르테논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제안한다. 여기서 두 작품이 서로 나란히 배치가 되면서 새로운 맥락이 생겨나고 관객은 너무나 잘 알고 있던 ‘키스’가 아닌 파르테논과 연결된 ‘키스’를 보게 된다.
이후에도 전시는 영국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파르테논 조각상과 파리 로댕 박물관의 소장품을 병치해 둘 사이의 관계를 입증해나간다. 또 로댕의 드로잉이 담긴 수첩과 영국 박물관 맞은 편 호텔 노트에 끄적인 드로잉을 보여준다. 사이사이 어린 관객이나 대중을 위해 조각의 기본적인 도구와 설명도 배치해두었다.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파편(Fragment)’ 섹션이다. 로댕은 머리와 팔 다리가 잘려나간 그리스 조각상들을 통해 과거의 신화적 시대적 맥락을 제거하고 형태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의 조각도 머리나 팔 다리가 없는 채로 만들거나 그것을 그리스 그릇에 꽂으면서 재조합을 해나간다. 그러면서 전시는 ‘감정(Emotion)’섹션으로 넘어가는데, 이는 로댕이 그리스 조각상에서 살을 가진 인간의 감정을 끌어내는 과정을 설명한다.
놀라운 것은. 그리스의 조각상들이 신을 표현하기 위해.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극도로 이상화된 몸을 표현했다면, 로댕은 그 이상화된 몸의 불완전한 형태를 통해 결국 자연스럽게 인간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 조각상이 미를 대변한다고 착각하고 그 판타지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로댕이 현대 조각가가 될 수 있었던 건 그 판타지를 깨고 나왔기 때문인데, 이 전시는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큐레이팅을 통해 로댕의 그런 측면을 보게 해준다. 이런 것들을 모두 설명하진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둘의 병치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클라이막스에 ‘칼레의 시민’ 군상이 유리창 너머로 들어오는 자연광을 받으며 감동을 이끌어 낸다.
'칼레의 시민'이 표현한 것이 무엇인가. 전쟁을 끝내기 위해 희생을 자처한 평범한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순간의 숭고함을 담고 있다. 이 전시에서 보여준 그 어느 그리스 조각보다도 아름답고 위대한 모습. 전시를 보다 자연광이 들어오는 아주 밝은 공간에 들어서며, 가장 큰 규모의 칼레의 시민을 만나게 되면 누구나 어렴풋이 그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관람객들은 여러 번 칼레의 시민 주변을 돌면서 생생한 표정과 몸짓을 감상했다.
이 ‘칼레의 시민’이 자연광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도 큐레이팅의 산물이다. 전시가 이뤄진 세인즈버리 갤러리는 2014년 문을 열었는데 지난번 수중 유물 전시때만 해도 바깥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 전시를 위해처음으로 양쪽의 창문을 다 개방했다고 한다. 또 조각들은 관객의 눈높이에 배치가 되어 있고, 전시 공간에 벽이 최소화되어 있다. ‘칼레의 시민들’을 기준으로 전시장을 한 바퀴 돌아가는 구조여서 조각을 360도에서 관람할 수 있다. 전시장 구조는 로댕의 작업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이 전시는 메릴린치 은행의 후원으로 로댕 박물관과 협업을 통해 탄생하게 됐다. 사실 그 의도는 결국 로댕의 아름다운 작품들을 영국 박물관이 가능하게 했다(!)는 어찌보면 속이 시커먼 (엘긴 마블을 그리스가 돌려달라고 하는 상황에서) 주제일 수도 있는데 설득력있는 전개와 큐레이팅으로 그런 오해를 불식시켰다. 그러나 주제 때문인지 해외 순회 전시는 하지 않는 듯하고, 영국 박물관의 컬렉션만 영국 바스 등 3개 갤러리를 순회할 예정이다. 영국 박물관에서 전시는 2018년 4월 26일부터 7월 29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