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사로서 학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내 교실 안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인간이지만, 그 교실 안에서는 학생이라는 정체성으로 존재한다. 만약에 학생이라는 정체성이 없다면 그들은 내 교실 안에 없을 것이다. 교사로서 나는 그들을 무엇보다도 학생으로 대해야 한다. 그리고 학생, 특히 초등학생이라는 정체성에는 근대적 주체로서의 속성이 제거되어 있다. 그들이 실제로 근대적 주체로서의 면모를 종종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근대적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근대적 주체라면 그들을 그 시간에 학교에 가둘 모든 정당성이 사라지고 교사는 직업적 존재기반을 잃는다.
물론 근대적 주체가 아닌 인간임에도(혹은 근대적 주체 이전의 인간이기에) 보호되는 최소한의 권리가 있다. 그러나 사실 이 권리는 꽤나 자의적인 것임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아동들의 권리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권리 차원에서 논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보호주의적 차원에서 논의된다. 결국 아동권은 보편인권이 아동, 청소년에게 확장된 결과물이라기보다는 통치성, 사회의 수요, 교육적 효율성 등이 변화한 산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여기에 가족과 부모에 대한 레이어를 추가하면 이야기는 더 복잡해진다.)
학생인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인권을 전유하고 확장하는 방법보다 학생을 전유하고 확장하는 방법이 빠르다. 인권의 개념을 청소년과 아동에게 확장한다면 그것은 근대적 청소년과 교육을 완벽하게 전복시키는 것이고 새로운 세계관과 시스템을 요구한다. 윤리학, 사회학, 정치철학의 일대 전환을 요하는 것이다. 반면 후자는 교육철학만으로 가능하다. 예컨대 듀이주의자라고 한다면, 학생을 억압하고 질서 속에 가두는 것은 민주시민을 양성하고 경험을 중개하는 교육의 핵심적 목표에 어긋나기 때문에 지양해야 한다. 그것이 보편인권에 어긋나기 때문이 아니라 교육적으로 적절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