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에 컴퓨터 사인펜과 수험표 달랑 든 채로
한 손에 컴퓨터 사인펜과 수험표 달랑 든 채 시험장에 들어갔다. 가방도 도시락도 챙기지 않고, 다만 부모님의 배웅을 받으며 그렇게 수능을 보러 갔다.
고삼의 꽃말은 수능이요, 미자 일생에 가장 중요한 것도 수능이라 한다. 물론 나한테는 아니었다. 1학년 때부터 모의고사를 쳤음에도 딱히 중요성을 몰랐으며 그저 때 되면 준비할 거라는 마음뿐. 심지어는 때라는 것도 오지 않았다. 나의 대입 전형에는 수능 반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했다. 고삼이면 다 수능을 보는 줄 알았던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수능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자습실에 종일 들어가 있었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교실에 있었다. 고삼 2학기의 내신은 반영되지 않는다기에 사실상 놀았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도 속하지 않았다. 내 기준에서 지극히 일상적인 하루를 보냈을 뿐이다. 수업을 듣고, 수행을 보고, 시험을 치는, 평범하게 반복되는 날이었다. 그저 교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칠판의 수능을 세는 디데이가 줄어드는 걸 볼 뿐이었다.
별다른 수능 공부를 하지 않은 나는 모의고사도 적당히 보았었다. 공부 안 한 수준에서의 적당히. 국어는 읽을 수야 있으니 평균쯤, 수학은 다 까먹었고 영어는 읽을 줄은 알아도 뜻을 몰라 평균 아래, 한국사야 기본 지식으로 몇 문제인가 맞추고 탐구 과목은 원하는 걸로 골랐으니 대충 평균. 언젠가는 수능 공부를 해서 더 잘 풀게 되지 않을까 예상했던 고등학생 여느 날의 나와 달리, 이 상태 그대로 수능을 보러 갔다. 대입에 영향이 없어서 공부하지 않았고, 방학 중 잠시 했던 공부는 잊어 먹었다.
수험장이라고 다른 분위기이진 않았다. 그저 처음 가본 고등학교의 구조에 어색함을 느꼈을 뿐이다. 처음에는 무척 조용하다고 생각했으나 그것도 잠시, 같은 수험장에 배정된 절친한 친구로 보이는 학생들의 대화 소리에 정적은 금방 사라졌다. 어딜 가도 열아홉, 무얼 해도 학생들인 이들은 자신을 숨기지 못한다. 덕분에 긴장할 새도 없이 익숙한 소음을 배경으로 자리에 앉아 종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어떤 정신으로 시험을 봤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지금까지의 모의고사랑 비슷했다. 알면 풀고 모르면 넘기고. 몇몇은 찍고 다시 푸는 것을 반복하면서. 쉬는 시간이면 찾아오는 단짝들의 소리는 낯익었고, 점심시간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반가웠다. 익숙한 음식 냄새에는 분위기 탓인지 급식실 풍경이 씌워졌고, 이렇게 찾아온 오후 시간에는 다시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밖은 한창 어둑해져 있을 때였다. 교문 앞에 마중 나와 있는 부모님들 사이로 우리 가족을 찾고 그렇게 이젠 정말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눈물이 나온다고 했고 나는 별생각 없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약간 어이없었고 조금 울적했던 것도 같다. 한 것도 없는데 수능을 봤다는 허탈함과 모든 끝에 자연스레 붙는 아쉬움이었다. 수능은 결과가 중요한 하나의 시험인데 그 결과가 의미 없던 나에게는 그저 하나의 기억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친척에게 받은 치킨과 아이스크림을 들고 갔다. 매운 음식을 못 먹지만 치킨은 매운맛이었고, 오랜만이던 아이스크림 케이크는 여전히 맛있었다. 어떤 기억으로 남은 하루는 평생을 가기도 한다던데 이날은 언제까지 간직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