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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mize Impact Feb 01. 2021

아토피로 고생할 나이는 지났는데...?

중학교 1학년 때 즈음인가?

초등학교 때부터 간간이 다니던 피부과를 오래간만에 찾았을 때,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의사가 나와 엄마를 향해 말했다.


"아토피로 고생할 나이는 지났는데~?"


의사의 눈은 나를 보고 있었지만,  당시를 지금에 와서야 복기해보자면  말의 청자는 내가 아닌 나의 보호자인 우리 엄마였던 듯하다.


그 표정이 어찌나 인상 깊던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 의사의 안경 너머로 보이는 아니꼬운 눈빛이 아직까지 생각난다. 중학생인 내가 아토피를 달고 온 게 뭔가 잘못이라고 한 것처럼 나는 그때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때, 그 장면 그리고 그 말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난다. 아마, 의사는 스테로이드 알약과 연고를 처방했을 것이다. 1990년대 말이나, 2021년이나 피부과의 '스테로이드 알약/연고' 처방은 그다지 달라진 게 없다. (물론 고가의 신약이나 처방법은 많이 개발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아토피라는 병명이 그다지 알려지지 않던 때다.

아토피가 옮는 병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도 있었고, 당시에는 워낙 어린아이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났기 때문에 지나가는 말로 "교복 입을 때 즈음이면 낫는 병"이라는 이야기까지 있었다(실제로 주변 어른들이 내게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무튼 교복을 입은 중학생인 내가 병원에 방문했을 때, 의사가 그렇게 반응하던 시절이었던 건 분명하다.


그렇다. 나는 날 때부터 아토피를 갖고 태어났고, 30대 중반이 된 지금도 여전히 아토피다.


아토피를 달고 30여 년을 훌쩍 넘은 삶을 살며, 아토피와 연관된 수많은 찰나의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때 저 말을 왜 이다지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무튼 썩 좋은 기억이 아닌 건 분명하다.


지금 생각해보자면, 의사의 저 "아토피로 고생할 나이는 지났는데...?"의 말과 뉘앙스는  중학생인 나를 '의사의 주관적 데이터에 근거해, 아토피를 벗어날 나이임에도 아토피를 갖고 있는 특이한 몸'으로 분류하였고, 같이 간 엄마는 '아토피를 벗어날 나이를 지나고도 자녀의 아토피를 키운 관리를 소홀히 한 어머니'로 분류했다.


그러고 자그마치 20년이 더 넘는 세월이 훌쩍 지났음에도, 아토피 자녀를 둔 엄마를 향한 프레임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아토피에 대한 인식 그리고 연구는 체감을 할 정도로 많이 바뀌었음에도 말이다.



아토피를 앓는 십수 년의 시간 동안, 종종 엄마에게 "미안하다"라는 말을 들었다. 내 아토피에 대한 책임은 엄마가 미안할 게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토피로 너무 고생하거나 힘들어할 때 엄마는 종종 미안하다고 했다. 그 미안하다는 말의 기저에는 다양한 의미가 숨겨져 있을 테지만, 그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그저 이 몸으로 세상에 왔고, 이 몸으로 그런대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건 미안할 것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어떠한 몸'이라는 하나의 사실이다. 그리고 그 안에도 나름의 다양한 세계가 있다.


아토피로 고생할 나이가 지난 '나이'는 없다. 어려서부터 함께 나고 계속 지닐 수도, 어느 순간 나을 수도, 없다가 갑자기 생길 수도 있다. 그렇듯 아토피의 원인으로 돌려야 할 누구의 '탓'도 없다. 아토피라는 정답 없는 질병에서 모성의 프레임이 거둬지는 사회를 상상한다.




한국에는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이를 두고서 그 원인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건 일차적으로 아토피 환아의 엄마를 탓하고 책임을 묻는 잘못된 문화가 있습니다. 수많은 아토피 치료법이 명확한 근거 없이 공유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아이에게 가장 적절한 치료법을 찾는 것 역시 엄마의 몫이 되곤 합니다. 간혹 전국을 누비며 아이에게 효과적인 치료법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 경우가 알려지면, 그런 헌신적이면서도 완벽한 엄마의 모습에 다른 이들은 주눅이 들고 자책감을 갖게 됩니다. 그 속에서 가부장적인 모성신화는 점점 강화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엄마들에게는 종종 아이의 질병에 유해한 물질을 차단해야 하는 역할이 주어집니다. 새집증후군을 피하고 알러지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음식을 먹지 않게 노력할 수는 있지만, 미세먼지 같은 대기오염이나 판매하는 음식물에 있는 화학물질을 피하기란 실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유해인자를 피하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게으른' 엄마라는 호칭을 얻게 됩니다. 반대로 적극적으로 행동하면 '예민한' 엄마가 되지요.  
무엇보다 이렇게 엄마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아토피 질환을 유발하는 환경을 만든 다양한 사회적 환경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는 효과를 낳습니다. 질병의 사회적 원인이 은폐되고 그 비용을 가장 많은 짐을 감당하고 있는 엄마에게 넘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세계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중략) 모성을 빌미로 엄마에게 불가능한 싸움을 시키고, 사회적 함께 책임져야 할 부담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일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 우리 몸이 세계라면/김승섭/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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