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imize Impact Apr 20. 2021

당신의 난치병을 친구라 생각한 적 있나요?

당신의 난치병을 친구라 생각한 적 있나요?


저녁 무렵 노트북을 무릎에 얹어두고 글을 쓰고 있는데 막내 숙모에게 전화가 왔다.

간혹 가다 외삼촌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내 얘기가 나올 때가 있다는데, 그 참에 전화를 거신 모양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스피커폰 너머로  외숙모가 물었다.


"그래, 요새 몸은 좀 어떻고?"

"새 동네로 이사 온 후로 공기도 좋고 그래서  많이 호전되었어요. 다 낫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관리가 가능한 정도로요. 요새는 아토피 관련해서 글도 쓰고 있어요"

"그래? 정말 다행이다. 그래서 어떤 글을 쓰고 있는데?"


나는 대략 설명했다.


"그래, 우리 엄마는 자기가 오랫동안 앓아온 질병을 정말 끝까지 싫어하시면서 돌아가셨거든. 그때 조금 다른 시선을 가지셨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 좀 아쉽지. 그래서 네가 쓰는 글은 '나는 질병과 어떻게 친구가 됐는가?'에 대한, 뭐 그런 거지?"


마지막 물음에 느낀 찰나의 찝찝함을 뒤로하고, 나는 타이밍을 놓친 채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네, 뭐 그런 거죠". 그리고 외숙모의 엄마는 어떤 고통을 겪다가 돌아가셨을까를 잠시 상상했다.


질병을 정말 친구처럼 대할 수 있을까? 대개 많은 사람들은 '난치병'을 친구로 비유하곤 한다. 치료에 대한 해답이 없고, 원인이 불분명하고, 고질적으로 몸에 붙어 있고, 어쩌면 평생을 갖고 살아가야 할 종류의 '질병'은 자주 '친구'로 비유된다. '이제 친구라고 생각하고, 평생 같이 살아가야지 뭐'라는 말의 출처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르지만, 나도 종종 그런 말을 하곤 했었다. 말이 늘 그렇게 회자되는 것처럼.


질병을 정말 친구처럼 대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질병'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위치는 그 고통이 감당 가능한 수준일 때 가능한 게 아닐까라고. 밤에 편히 잠을 잘 수 없고, 남들이 사는 평범한 세계에 발 디딜 수 없고,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기회와 선택들이 희미하고 멀게 느껴질 때에도 여전히 그 질병에 '친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라고. 이런 면에서 '나는 어떻게 질병과 친구가 되었는가?'라는 투병기 서사의 위험성을 본다. 질병에서 삶을 어느 정도 건져 올려낸 사람이 할 수 있는 언어와 그 질병에 깊이 몸을 담그고 있는 자의 언어는 분명히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같은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서사도 동일한 방식으로 일반화될 수 없다.




나의 질병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위치는 수시로 변한다


몇 해 전, 친한 선배와 방 한편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선배는 내 질병의 고통에 대해 누구보다 이야기를 깊이 들어주는 사람이었고, 건강하게 타고난 자신의 신체를 특권으로 인식했으며, 건강한 신체를 누릴 수 없는 이들에게 항상 미안한 감정을 표현했다(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그 당시는 급격하게 심해진 증상으로 삶의 사방이 막혀있다는 느낌이 들 때였다. 호전보다는 악화된 날들이 더 많았고 내일 당장 어떻게 몸이 변할지 몰라, 사람들과 약속 하나 잡는 게 그렇게도 어려웠다. 그 시간 동안 참 많은 책을 읽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책들은 대부분 질병, 환경 독소, 삶을 둘러싼 인공적인 환경이 어떻게 사람의 몸과 자연을 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 삶의 위기를 겪는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고통의 경험을 또 다른 계기로 만들어보려 애썼고, 실제로도 그랬다. 나는 내 질병을 긍정하려는 마음이 들었던지, 선배에게 말했다.


"선배, 그래도 나한테 아토피가 있어서 이런데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됐나 봐요. 어찌 보면 복인 것 같기도 해요"


늘 잠자코 이야기를 들어주던 선배는 버럭 화를 냈다.


"질병이 복이 된다는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야. 내 친구 중에는 호르몬 수치가 너무 낮아서, 하루 동안 일어나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되는 사람이 있어. 너는 그 사람 앞에서 질병이 복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니? 질병은 네 삶에서 조율하고 해결해나가야 할 중대한 문제인 거지 복은 아니야. 애써 질병을 긍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려는 태도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찌르듯 명확한 말 앞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질병을 긍정하고 있는 이에게 사람들이 대개 보여주는 반응이 아니었고, 더욱이 그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질병을 더도 덜도 아닌 인생의 중대한 문제라 바라보는 태도. 질병은 오히려 삶의 기회가 될 수 있을지언정, 친구도, 적도, 복으로도 이름 붙여질 수 없다는 말에 대해 그 후로 오랫동안 생각했다.


삶의 면면마다 질병이 주고 또 막는 많은 기회와 선택들에 우리는 반응하며 살아가야 할 뿐이다. 그래서 질병은 우리 삶의 중대한 문제가 된다.


몸은 질병의 깊음과 얕음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특히, 치료법이 없는 난치의 질환일수록, 그 질병을 평생 관리하며 살아가야 할수록, 삶의 면면마다 질병이 주고 또 막는 많은 기회와 선택들에 우리는 반응하며 살아가야 할 뿐이다. 그래서 질병은 우리 삶의 중대한 문제가 된다.


몸의 상태에 따라 그 질병을 증언할 수 있는 화자의 위치도 변한다. 같은 질병을 두고도 누군가는 질병을 친구로, 복으로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그 말이 아득히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행여 같은 사람의 경험 안에서도 그 위치는 수시로 변한다. 질병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거나 또는 있는 그대로 보려는 태도 중 사실 그 무엇도 틀린 것은 없다. 단지, 질병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태도를 놓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기만하지 않고 개개인의 질병에 대해 더 솔직한 언어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젊은 아가씨가 얼굴이 그래서 어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