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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emouse Feb 01. 2021

드라마 (개인적)리뷰: 크라운

내향인 리더, 무척 외로운

영국의 국뽕 드라마인가 내내 의심하면서 봤지만 그러기엔 주인공의 외로움 그리고 타고난 내향성과 내면의 갈등을 참으로 세련되고 섬세하게도 표현했다. 시즌 1, 2 리뷰이다.


시즌 1에서 처음 2 에피소드는 전개가 느려서 지루했다. 화려하고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드라마라 관심이 갔던 것인데, 그런데 영국 왕족의 가정사라니, 영국에 살지도 않고 가보지도 않은 나는 느린 전개에 딱히 흥미가 생기지 않아서 몇년전에 에피소드 1,2를 보고는 마음을 접었었다. 다시 보게된 이유는 최근에 크라운 시즌 4에서 다이애나 왕비가 나온다고 하니, 드라마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할까 갑자기 궁금해진 것이다. 그래서 다시 시즌 1부터 보기 시작했다. 시즌 1을 다 보았을때는 내가 무엇을 놓칠뻔한 것인가, 처음의 지루함을 참고 보길 잘했다라고 생각했다. 이런 드라마가 또 있었던가 할만큼 세련됐다. 하우스오브 카드와 비교가 어쩔수 없이 되었는데, 하우스오브 카드를 재밌게 보기는 했지만, 뭐랄까, 사람이, 아니 이 큰 나라의 지도자가 어디까지 악할수 있는가를 보여준 하우스오브 카드는 극강의 맵단짠맛이었고, 크라운은 이미 어른이 된 한 여자의 성장드라마같아서 역시 이미 어른여자인 나로써는 감정이입을 안할수가 없는 매일 마시는 커피 맛이었다고 해야할까.


어느 한 장면에서 확 당기는것은 없었다. 보는 동안 나도 모르게 집중이 되고 감정 이입이 되었다. 그래도 가장 처음으로 눈을 번쩍 뜨게했던 드라마속 사건을 되짚어 보겠다. 


25세에 (여)왕이 갑자기 된 엘리자베스는 그시절 아마도 온 지구가 그랬듯이 남자들 뿐인 정치판에 그들의 우두머리급으로 발을 어쩔수없이 들여놓게 된다. 그런데 그 남자들은 그냥 아무 남자들이 아니라, 너무 많이 배워서 더이상 배울게 있을까 싶을만큼 많이 알고 많이 경험한 나이많은 정치인들이다. 그들이 아무리 아는것이 많고 경험한 것이 많아도 왕에게 결코 함부로 말하거나 괴롭게 하지 않는다. 왕을 괴롭히는것은 자신이 무지하고 무능하다는 자각이고 자책이다. 게다가 정치인들에게는 손녀뻘로 어리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지식이 영국을 통치하는 사람에게 필요한가를 바로 깨닫는다. 내향인인 왕은 무지한 상태로 억지부리지 않으며, 대신에 자신의 무지가 왕이라는 자리에 치명적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혼자 괴롭고 화가 난다. 어머니에게 가서 화를 낸다. 왜 나는 자라면서 남자들이 배우는 것들을 배우지 못한거냐며 따진다. 어머니는 그게 뭐가 잘못된건지 어리둥절하다. 그냥 그게 그때는 당연했기에 최선을 다해 어여쁜 여인이 되도록 가르쳤던 것 뿐이었다. 어머니에겐 시대가 변했을 뿐이었다. 


나는 여왕이 아닌데, 영국사람도 아닌데 이 장면에서 여왕에게 감정이입이 되면서 확 눈물이 났다. 나를 둘러싼 타인들이, 꼭 그들이 남자가 아니더라도, 나보다 너무나 월등하여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할말을 잃었던 기억. 미국에서 처음 회사를 들어가거나 어떤 모임에 나갔을때 나의 레벨이 현저히 낮구나 깨닫는 순간 난 그동안 뭘 한거냐며 자책하고 괜히 억울했던 기억. 그리고 이를 악물었던 기억. 특히나 여자로써 더 자주 느꼈던 미묘한 열등감과 소외감.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발버둥쳤던 일련의 과정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여왕이 무지를 극복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너무 몰입한 나머지 드라마속 주인공에게, 그래 잘했어, 그렇게 시작하면 되, 라고 중얼거렸다.


엘리자베스의 남편은, 아직 살아계신분에게 이런 말을 무례하지만, 드라마만 보자면 젊은시절 '발암' 캐릭터였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포기해야 했던 그 스트레스가 상당했겠다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용서되지 않는 캐릭터이다. 이 드라마는 참 조용하고 세련된 페미니즘 드라마가 아닌가 생각했다. 여왕의 남편, 참 힘들었겠다 생각하다가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역사적으로 모든 왕들, 대통령들, 지도자들의 부인들은 어찌하여 저런 스트레스를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내조라는 이름으로 오버스럽게 협조적인 케이스가 더 많았는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편은 하나도 없을것같은 지독히도 고독한 여자로써 왕이라는 위치, 초반에는 본인도 이 왕관이 참 싫어 죽겠는 표정이 너무나 분명한데, 가장 가까울것 같은 남편이 "나는 궁궐이 짜증나고 답답하니 밖에서 좀 놀께" 라며 허구헛날 파티하고 바람피고 한다면. 그리고 교회의 수장으로써 영국의 왕은 이혼을 할수 없다면. 이 필립이라는 왕의 남편은 과연 성별을 바꾸어 그가 여자였고 왕비였다면 대역죄인이 되어 아무리 신사의 나라라지만 당장 파면을 당할것같은 짓을 버젓이 하고 다닌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서 그 모든 짓거리를 지켜봐야만 하고 그러면서 큰소리로 싸울수도 없고 어디가서 남편 흉도 못보는 엘리자베스는, 다른 여타 드라마처럼 울고 불고 악쓰고 하는 모습은 일절 없는데, 우아함속에서도 그 속이 시커멓게 타는게 다 보이니, 이게 내가 오버하는건지 드라마를 잘 만든건지, 보면서 너무나 생생하게 가슴이 아팠다. 이 드라마의 이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들이 과연 페미니즘이다라고 생각했다. 


엘리자베스가 프라임 미니스터였던 윈스턴 처칠의 잘못(그의 건강에 대한 거짓말)을 버젓이 보고도 감히 그걸 지적할수가 없어서 전전긍긍하는 모습 역시 진한 여운을 남겼다. 여자로써, 이제 왕이 된지 얼마 안된 한참 어린 사람으로써, 무엇보다 남을 존중하는 천성을 가진 내향인으로써, 처칠이 얼마나 부담스럽고 위압적인 존재였을까. (남을 존중하는 천성은 실제로 그런건지 드라마가 국뽕이라 그렇게 묘사를 한건지 확실히는 모르겠다) 나는 백퍼센트 그 상황이 이해가 되면서 또 과몰입을 했다... 어떻게 처칠의 잘못을 감히 지적을해, 난 못해.. 라고. 그런데 엘리자베스는 결국 당당하게 잘못을 지적하고 (드라마에 따르면)어린아이 혼내듯이 불러다가 혼구녕을 낸다. 드라마 보다가 박수가 저절로 나왔다. 그렇다 나는 많이 몰입했다. 그리고 또 어쩔수 없이 생각했다. 엘리자베스가 남자였더라도 어쨌거나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처칠에게 한소리 하는게, 저게 저렇게 힘든 일이었을까.


드라마의 재미도 있지만 역사를 배우는 재미도 있으면서, 무엇보다 약자로써 너무 많은 책임을 지며 강자 집단을 상대하는 그 부담과 스트레스가 잘 표현되었는데, 그렇다고 그 부담과 스트레스가 보기 힘들지가 않고 오히려 참으로 세련되고 우아하다. 그래서 비슷한 스트레스로 고민할때 오히려 위로가 되어 주었다. (난 결코 엘리자베스만한 스트레스는 아니었다) 딱히 악인과 선한사람의 구분이 없어서 클리셰가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할수 있었는지 이 드라마 정말 대단하고 특이하다. 시즌 1, 2 에서는 젊은 엘리자베스가 나오고 3 부터는 중년이 된 엘리자베스라서 배우가 바뀐다. 젊은 엘리자베스 역의 배우가 정말 섬세하다. 내가 이 글을 쓰면서도 섬세하다는 말을 많이 쓰고 있는데 다른 말이 생각이 안날 정도로 그저 섬세하다. 아직 안본 사람이 있다면 시즌1 초반의 느린 전개만 잘 참는다면 대어를 낚은 기분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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