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님,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2025년, 나는 처음으로 거래처에 선을 그었다. 10년간 ‘네, 알겠습니다’만 반복하던 내가 ‘No’를 말한 순간이었다.
1억 계약이 무산됐다. 회의실에서 팀장이 “대안 있나? “라고 물었을 때, 나는 다르게 답했다.
“이 거래처는 제가 더 이상 못 합니다.”
팀장의 눈이 커졌다. 후배들도 당황했다. 영업 10년 차가 거래처를 포기한다는 건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확신했다. 어떤 관계는 끝내는 게 답이다.
문제의 병원은 6개월째 같은 패턴이었다. 계약 직전까지 진행하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하며 번복. 세 번째였다. 매번 우리 제안서로 경쟁사 가격을 낮추는 지렛대로 쓰고 있었다.
나는 원장님께 마지막으로 찾아갔다. 이번엔 제안서도, 계약서도 없었다. 대신 A4 한 장을 들고 갔다. 6개월간의 기록이었다.
“원장님, 이게 우리가 함께한 시간입니다.”
- 1차 제안: 2월 15일, 4시간 상담 후 보류
- 2차 제안: 4월 3일, 가격 조정 후 재보류
- 3차 제안: 5월 20일, 경쟁사 비교 후 무산
- 총 투입 시간: 6개월
- 제안서 수정: 11회
원장님이 불편한 듯 의자를 당겼다.
“그래서요?”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더 이상은 제안하지 않겠습니다.”
처음으로 상담실에 정적이 흘렀다. 원장님도 예상 못 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왜 이래요?”
“원장님께는 저희가 필요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저희 제안은 경쟁사 협상용이고요. 그건 원장님의 선택이니 존중합니다. 하지만 저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원장님이 말했다.
“그럼 다른 담당자를 보내든지…”
“아닙니다. 회사 차원에서 거래를 재검토하겠다고 전달하겠습니다. 진짜 파트너를 원하는 병원들이 많거든요.”
문손잡이를 잡았을 때, 원장님이 불렀다.
그때 원장님의 얼굴에는 비로소 당황함이 비쳤다.
“잠깐, 그 정도까지는…”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거래처를 등졌다.
회사로 돌아와 팀장에게 보고했다.
“그 병원은 블랙리스트로 분류하시죠. 우리 시간도 비용입니다.”
팀장이 한참 창밖을 보더니 물었다.
“1억이야. 확실해?”
“네. 이 거래처 때문에 놓친 병원이 셋입니다. 기회비용이 더 큽니다.”
팀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판단했으면 믿는다. 모든 고객이 우리 고객은 아니야.”
일주일 후, 그 병원 실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원장님이 다시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이미 다른 병원과 일정이 잡혀 있어서요.”
그리고 정말로 다른 병원과 계약했다. 첫 제안에 바로 OK 한 곳이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였다. 5천만 원. 1억 원의 절반이었지만, 투입 시간은 10분의 1이었다.
영업 10년, 가장 늦게 배운 교훈이다
“모든 관계가 다 내 것일 필요는 없다.”
초년차 때는 모든 거래처를 붙잡으려 애썼다. 거절당하면 내 탓이라 여겼다. 애원도 했고, 굴복도 했다. 하지만 이제 안다. 어떤 관계는 놓는 게 답이다. 내 시간과 에너지를 존중해 주는 고객에게 집중하는 게 진짜 프로다.
파트 0에서 ‘영업에 정답은 없다’고 썼다. 이제 한 문장을 더한다.
“하지만 오답은 있다. 나를 지우는 관계가 그것이다.”
영업은 숫자 게임이 아니라 선택의 예술이다. 무엇을 잡을지 아는 것보다, 무엇을 놓을지 아는 게 더 중요하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한 문장을 연습한다.
“감사하지만, 저희와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문장이 편해진 날, 비로소 10년 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