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님, 그냥 가세요. 정말 괜찮습니다.”
2024년 봄, 4천만 원 계약이 무산됐다. 3개월을 공들인 제안이었다. 실패 이유는 단순했다. 경쟁사가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고, 우리는 따라갈 수 없었다.
회의실에서 팀장이 “대안 있냐? “라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깔끔하게 놓겠습니다.” 후배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알고 있었다. 이번 달 개인 목표의 20%가 날아간다는 걸.
다음 날, 계약이 무산된 병원을 찾았다. 빈손이었다. 제안서도, 브로셔도, 박카스도 없었다.
“어? 과장님 왜 오셨어요?” 실장님이 의아해했다.
“그냥…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계약 못 해서 미안해요. 우리도 어쩔 수 없었어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좋은 조건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원장님이 상담실로 불렀다. 좋은 원두라며 커피를 내려주는 그의 눈은 미안함이 가득했다.
“경쟁사 조건이 너무 좋아서…”
“당연한 선택이십니다.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왜 오셨어요?”
“사실… 질문이 있어서요.”
나는 노트북을 꺼냈다. 화면에는 다른 병원 매출 분석 자료가 있었다.
“원장님, 이거 한번 봐주실 수 있으세요? 제가 담당하는 다른 병원인데, 매출이 계속 떨어져서요. 원장님이 워낙 경영을 잘하셔서… 조언 좀 구하고 싶습니다.”
원장님의 눈빛이 달라졌다. 30분 동안 열정적으로 분석해 주셨다. 마케팅 전략부터 비용 구조까지. 메모가 두 페이지를 넘어갔다.
“그 병원 원장님께 이렇게 전달하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일어서려는데 원장님이 물었다.
“과장님, 진짜로 아무것도 바라고 온 거 아니에요?”
“네. 계약은 이미 끝났잖아요. 그래도 가끔 들러도 될까요? 원장님 조언이 정말 도움이 되거든요.”
“언제든지요.”
그 후 3개월, 나는 월 1회 그 병원을 찾았다. 때로는 업계 소식을 전하고, 때로는 경영 조언을 구했다. 아무것도 팔지 않았다. 오히려 경쟁사 제품 사용법을 물으면 성심껏 답했다.
“과장님은 참 이상해요. 계약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잘해주세요?”
“저도 배우는 게 많아서요. 원장님 병원이 잘되는 게 저한테도 공부가 됩니다.”
6월 중순, 원장님에게서 문자가 왔다. “과장님, 경쟁사 장비 자꾸 오류 나는데 연락이 안 돼요. 혹시 아시는 분 있으세요?” 나는 경쟁사 AS 담당자 번호를 보내드렸다. 30분 후 전화가 왔다.
“해결됐어요. 그런데, 이런 거 알려주셔도 돼요?”
“당연하죠. 원장님 병원이 잘 돌아가는 게 중요하지, 누구 제품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8월의 어느 날, 원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과장님, 우리 경쟁사 계약 끝났어요.”
“아, 재계약하시나 보네요.”
“아뇨. 과장님이랑 하고 싶어서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동안 보니까, 과장님이 진짜더라고요. 계약 없어도 꾸준히 오시고, 경쟁사 제품 문제 생겼을 때도 도와주시고. 솔직히 경쟁사 AS는 형편없었어요. 급할 때 연락도 안 되고. 근데 과장님은 우리 고객도 아닌데 바로 달려오셨잖아요. 이런 사람이랑 일해야죠.”
계약 금액은 5천만 원이었다. 당초 제안보다 1천만 원이 많았다. 원장님이 먼저 제시한 금액이었다.
“빈손으로 왔을 때가 더 많이 가져가네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주세요. 영업 오지 말고, 그냥 놀러 오세요.”
팀 회의에서 보고했다. “3개월 전에 놓친 4천만 원이 5천만 원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팀장이 물었다. “비결이 뭐야?”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냥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했을 뿐입니다.”
영업 10년, 행운의 거래는 빈손으로 왔다. 계약서 없이 찾아간 날들이 가장 큰 계약서가 됐다. 놓는 것의 미학, 비우는 것의 충만함.
파트 1에서 ‘진정성이 습관이 되면 성공한다’고 믿었다가 독이 됐다고 썼다. 이제 안다. 진정성은 ‘자주 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 ‘바라지 않는 것’이다.
빈손이 가장 큰 선물이 되는 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