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짜’에서 평경장이 고니에게 한 말이 있다. “이 바닥엔 영원한 친구도 원수도 없어.” 이 대사를 진짜로 이해한 건, 경쟁사와 윈윈 하던 2023년 8월이었다.
파트 6에서 말한 ‘임시 동맹’. 그때는 아름다웠다. 신규 개원에서 고객이 원하는 경쟁사 장비를 직접 연결해 줬고, 서로 없던 매출을 만들었다. 반년 간 교차 레퍼럴 8건, 신규 매출 6억. 숫자는 달콤했다.
하지만 달콤함은 경계를 무너뜨린다. 매년 5·8·10월은 특히 까다롭다. 5월엔 세금 여파로 병원 현금 흐름이 마르고, 8월은 휴가철로 내원·결정이 늦어지며, 10월은 명절로 인한 근무일수가 짧아 매출이 낮아진다.
2023년 8월. 개인 실적이 바닥이었다. 병원들도 세금 납부와 휴가철로 매출이 곤두박질. 월말까지 큰 건이 필요했다. 그때 지역 부동산에서 정보가 들어왔다. S병원이 맞은편 80평으로 확장 이전한다는 소식.
“원장님, 불편하시거나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어휴, 소문이 벌써 났어?”
머릿속 계산기가 돌았다. 장비만 2억. 이번 달 실적을 한 방에 해결할 기회였다. 실장님께 박카스를 건네며 정보를 캐냈다. 다른 업체는 아직 접촉 전.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노트북을 열어 견적을 짰다
- (Before) 장비 1억 + 재료 1억 = 총 2억
- (After) 장비 8천만(-20%) + 재료 7천만(-30%) = 총 1억 5천만(-25%)
- 결제 옵션: 무이자 12개월, 유이자 36개월(선택)
원장님은 흡족해했다. “다른 업체는 바빠서 생각 없어 “. 이번 달은 운 좋게 끝나겠다고 느꼈다. 콧바람을
불며 계단을 내려가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경쟁사 과장이었다.
“병원 확장해요?”
“아… 예…”
2차 상담. 원장님 책상 위에 경쟁사 제안서가 보였다. 종이를 덮는 소리가 ‘서걱’ 하고 났다. 내 불안은 그 소리와 함께 덮어지지 않았다.
“대리님, 저도 이번 달 실적이 부족해요.”
경쟁사 과장의 메시지. 나는 휴대폰을 그대로 덮었다. 우리가 정한 ‘투명한 협업’ 원칙? 지금은 각자도생이다. 손가락이 멈췄다. 원칙을 지킬까, 아니면 선의의 경쟁을 할까. ‘동맹’의 정의를 머릿속에서 다시 찾았다. 정보 공유까지가 동맹인가, 가격을 건드리는 순간 끝인가. 10초쯤 망설였다. 그리고 알았다. 오늘은 생존의 날이라는 걸.
3차 상담. 원장님이 말했다.
“저쪽에서 장비, 재료 합해서 1억에 하겠대요. 민 대리는?”
“1억 4천만까지 가능합니다.”
“좀 더 안 될까요?”
“죄송합니다. 이게 한계입니다.”
일주일 후, 경쟁사가 1억에 계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차장으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차에 앉아 시동을 끄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5천만 원. 월 실적의 절반이 날아갔다. 더 아픈 건, 내가 경쟁사에 정보를 줬다는 사실이었다. ‘협업’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스스로 무덤을 판 셈이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건 내가 5천만 원 소액 계약을 마치고 돌아가는 카페였다.
“축하해요, 과장님.”
“어휴, 민 대리님도 경쟁하셨잖아요.”
“그럼요. 각자 살아야죠.”
커피잔을 들며 웃었지만, 입안은 쓰디썼다.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침묵이 길어졌다. 에어컨 소리만 카페를 채웠다.
“사실… 미안해요.” 그가 먼저 말했다.
“저도요. 우리 둘 다 몰렸으니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알면서도 했을 거잖아요. 저도, 과장님도.”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맞는 말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각자가 옳았고, 동시에 틀렸다.
“이번 한 번만 봐주세요.”
“아뇨. 서로 최선을 다했는걸요.”
“앞으론…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5·8·10월만 피하면 되지 않을까요?” 내가 농담처럼 말했다.
“아니면 아예 지역을 나누던가요.”
그날이 지역 내 경쟁사와의 마지막 ‘동맹’이었다.
파트 6에서 세운 협업 원칙이 무너진 자리에, 새로운 원칙을 세웠다.
동맹 불가 조건
1. 같은 지역 + 같은 제품군
2. 압박 시즌(5·8·10월) : 세금/휴가/매출 감소로 출혈경쟁 위험
3. 5천만 원 이상 빅딜 : 장비+재료 묶임, 라인 전체 흔들림
동맹 가능 조건
1. 타 지역 담당자와 정보 교환(동선·영역 불겹침)
2. 완전히 다른 제품군 간 협업(치환 불가)
3. 고객이 먼저 요청한 비교견적(투명성 문서화: 이메일/문자 로그)
운영 원칙
1. 시작 전 레드라인 합의(가격 하한)
2. 로그 남기기(언제·무엇을 공유했는지 기록)
3. 월말 5 영업일 전 동맹 일시중지
이제 나는 인천의 L과장, 경기도의 K팀장과 협업한다. 지역이 겹치지 않으니 진짜 윈윈이 가능하다. L과장이 인천 병원 정보를 주면, 나는 서울 트렌드를 전한다. 작년엔 L과장 덕분에 인천 병원의 분원을 서울에서 계약했다. 3억짜리 빅딜이었다. 나는 보답으로 서울 대형병원의 인천 확장 정보를 넘겼다. 서로의 파이를 키우는 협업. 이게 진짜 동맹이다.
영화 속 평경장 대사가 맞았다. 이 바닥엔 영원한 친구도 원수도 없다. 상황이 동맹을 만들고, 상황이 동맹을 깬다. 파트 11에서 “임시 동맹”이라고 쓴 건 예언이었나 보다. 모든 동맹은 임시다. 시장이 좋을 땐 함께 웃지만, 파이가 줄면 칼을 뺀다. 그게 나쁜 게 아니다. 자연스러운 거다. 고객 앞에선 파트너, 실적표 앞에선 경쟁자. 오늘의 동료가 내일의 적이 되고, 모레엔 다시 차를 마실 수도 있다.
동맹의 유통기한은 다음 실적 마감일까지다. 그래서 영업엔 정답이 없다. 상황이 답을 만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