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 12. 장기가 아닌 필살기

by 민 과장


“그 조건이면 경쟁사와 하셔야죠.”

입은 그렇게 말했지만, 몇 날 며칠 공들인 제안서와 웃으며 약속하던 원장님의 얼굴이 스쳐 갔다. 그날, 내 안에서는 ‘관계’와 ‘조건’이 정면으로 부딪혔다.


2019년, 담당 구역에 100평짜리 큰 병원이 있었다. 대표 원장님과 친분이 있어 가끔 저녁에 챙겨 뵙던 곳이다. 명절엔 관례 선물을 준비했고, 언젠가 개원할지 모를 페이닥터(고용의사) 들까지 함께 챙겼다. 손엔 빨간 가방 하나, 가을이면 더 선명해지는 색이었다.


대표 원장님 진료가 끝나기를 기다리다 페이닥터의 손짓을 받았다. “주임님, 개원합니다. 이 근처고, 임대 계약 끝났고 12월 오픈이에요.” 명절마다 들고 간 빨간 선물 가방이 마침내 정보의 문을 열어준 순간이었다. 관계가 만든 첫 번째 카드였다. 명함을 다시 건네고 연락처를 확인했다. 마침 대표 원장님 진료도 끝이 났다. 페이닥터도 챙겼냐는 말에 “원장님, 이미 인사드렸습니다. 제가 끝까지 깔끔하게 책임지겠습니다.”라고 고개를 숙였다.


사무실로 돌아와 상권 자료를 만들었다. 주변 7개 병원의 규모와 출신, 카드 매출로 수요를 수치화했다. 마케팅 방향과 장비 세팅 초안도 붙였다. 1차 미팅에서 상권과 진료 방향, 장비 큰 틀을 맞췄고, 2차에선 스케줄을 D-데이로 쪼개 세무·노무·인테리어 타임라인을 정리했다. 필요한 실무 파트너도 연결해 리스크를 분산했다. 3차에선 장비 리스트를 경쟁 제품과 항목별로 비교했고, 다음 미팅에서 계약서에 사인하기로 구두 합의했다. 내 판에선 완벽한 수순이었다.


4차 미팅 전날 전화가 왔다. “다른 업체도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괜찮다고 했다. 자료와 신뢰, 단계 설계까지 빠진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또 전화가 왔다. “다른 업체로 결정했습니다.” 상대는 내가 모르는 필살기를 숨기고 있었다. 나는 짧게 답했다. “아, 계약하셨군요. 그 조건이면 당연히 경쟁사와 하셔야죠.” 전화를 끊고 나서야 숨이 짧게 끊겼다


대표 원장님께 사정을 전하니 조심스레 덧붙이셨다. “거기서 지원을 꽤 해준다더라.” 그제야 퍼즐이 맞았다. 그들의 필살기는 세 가지였다. 소모품 6개월 무상 지원, 무이자 장기 할부, 구매 장비 무상 업그레이드 옵션. 예컨대 오픈 초기 3~6개월 동안 월 현금유출이 ‘수백만 원’ 수준으로 완화되는 체감, 그리고 업그레이드 옵션이 ‘기술 뒤처질까’ 하는 불안을 사실상 0에 가깝게 보이게 만드는 조합이었다.


의사 입장에서의 계산은 명확했다. 오픈 초반엔 캐시 아웃이 캐시 인보다 빠르다. 무이자 장기 할부는 숨 고를 시간을 준다. 소모품 6개월 지원은 고정비 압박을 낮춘다. 업그레이드 옵션은 기술 격차에 대한 불안을 덜어 준다. 리스크 제거, 즉시 효용, 타이밍 정합성. 이 세 개가 한 세트로 들어오면, 아무리 두터운 관계라도 결정을 당기기 어렵다. 그날의 패인을 한 줄로 정리하면 이거다. 나는 ‘설계’는 했지만 ‘현금흐름 곡선’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 영업은 바둑이 아니라 포커였다. 패를 다 보여주면 지는 게임. 관계는 문을 열고, 조건은 도장을 찍는다. 나는 장기전의 성실함을 쌓았고, 그들은 개원 타이밍에 맞춘 결정의 레버를 정확히 걸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내 필살기를 이렇게 설계하기로 했다. 오픈 D-라인에 맞춘 단계별 청구(착수·중도·검수)로 현금흐름을 보호하고, 초기 소모품은 관련 법규와 사내 정책 범위 내에서 지원하며 계약서 특약으로 명문화한다. 덤핑이 아니라, 결정을 막는 리스크를 내가 먼저 지워 주는 방식으로.


대기실에서 시작된 인연, 빨간 가방은 마음을 열었다. 하지만 결국 계약을 닫은 건 조건이었다. 다음 판에선 마음을 연 뒤, 빨간 인주가 묻은 도장까지 내가 받겠다. 게임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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