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 11. 어쩔 수 없군, 이번만 임시 동맹이다.

by 민 과장


“과장님, 통화 가능하세요?” 신규 개원 현장. 고객이 원한 건 우리 대체재가 아니었다. 나는 경쟁사 과장의 번호를 눌렀다. 그날, 경쟁자와 협업하기로 했다. 경쟁사 번호를 누르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5년 차 영업인데도 손가락이 망설였다.


업계 사람, 적일까 동맹일까? 최근 글을 작성하면서 나와 비슷한 주제의 책들은 어떻게 쓰였는지 궁금했다. 서점에서 ‘영업’으로 검색해서 자리에 앉아 3~4권을 빠르게 훑었다. 대부분 ‘이렇게 해라’식 방법론과 마인드셋을 강조했고, 업계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는 어조가 두드러졌다.


나 또한 초년차 때는 이 말에 동의했다. 초년차였던 나는 같은 거래처에서 비슷한 장비로 경합했다. 당시 다양한 자료를 준비한 가운데 경쟁사 장비를 깎아내리는 페이지도 넣었다.


점심시간, 원장님과 미팅을 위해 기다리고 있으면 경쟁사 직원도 멀찌감치 앉아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알지만 시선은 준비한 자료에만 집중했다. 상담실 호출이 떨어지면, 먼저 들어간 쪽이 이긴 듯 으스댔다.


“대리님, 경쟁사에선 이거보다 저렴하게 판매해요.” 안타까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저 눈빛엔 ’더 없냐?’가 내재됐다. 평소 관리를 잘해드린다는 말로는 설득이 어려웠다. “생각해 볼게요”라는 말을 끝으로 상담실 문을 닫았다. 입술을 한 번 깨물고 대기실을 봤을 땐, 경쟁사 직원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엔 기대감과 불안함이 공존했다.


나와 바통 터치를 하곤 상담실에 들어가자마자 웃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실장님이 “우리가 도와줄게요”라며 응대했지만, 목소리는 어딘가 힘이 빠졌다. 며칠 후 다시 방문했을 땐, 원장님이 내 인사에 짧게 답하고는 급한 환자가 있다며 진료실로 들어갔다.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도 휴대폰만 보며 지나쳤다. 밀렸구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는데 경쟁사 직원을 만났다.


“어이쿠, 죄송해요”. 그의 첫마디였다. 명함을 주고받으며 어쩔 수 없었다는 그의 말에 살살해 달라고 가볍게 부탁하곤 서로의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주차장에서 깨달은 건 단순했지만 뼈아팠다. 고객은 우리의 경쟁을 원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솔루션을 원한다. 우리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는 동안, 고객은 그저 최선의 선택을 찾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번엔, 같은 장면을 다른 방식으로 맞았다.


신규 개원을 진행했을 때의 일이다. 개원에는 보통 2~10억의 자금이 든다. 워낙 금액도 크고 구매해야 될 품목도 방대하다 보니, 한 곳에서 모든 장비를 구매하면 협상력과 매출 기여도가 함께 높아진다. 영업사원 입장에선 놓치고 싶지 않은 ‘빅딜’이었다.


“저는 페이 시절, 이 장비가 저한테 잘 맞았어요”라는 개원의 말에 잠시 고민했다. 그 장비는 경쟁사가 독점적으로 판매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보유한 대체 장비는 낮은 품질로 사용자 만족도가 떨어졌다. 당장의 매출이냐 장기적인 관계냐 사이에서 고민이 깊어졌다. 억 단위 계약에서 핵심 장비 하나를 경쟁사에 넘긴다는 건, 전체 딜의 주도권을 흔들 수 있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내 안의 자존심이 속삭였다. ‘대체품으로 설득해 봐.’ 하지만 고객의 표정은 이미 답을 정한 듯 보였다. 잠시 망설인 뒤, 나는 말했다. “제가 경쟁사 직원에게 전화해서 최대한 좋은 조건으로 받아보게 할게요. 원장님 앞에서 함께 투명하게 진행하겠습니다.”


고객의 눈빛이 달라졌다. 의외라는 표정 뒤에 신뢰가 묻어났다. 전화기를 드는 손이 떨렸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5년간 쌓아온 경쟁의 문법을 스스로 깨는 순간이었다.


전화는 짧고 분명했다. “어휴, 감사해요. 저도 나중에 도와줄게요 “. 그의 목소리에도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 아마 그도 나처럼 복잡한 심정이었을 거다. 어쩔 수 없군, 이번만 임시 동맹이다. 고객은 원하는 장비를 합리적 조건으로 들였고, 나는 설득의 시간을 줄였다. 그는 없던 매출을 만들었다.


개원을 마무리 짓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처음엔 어색했다. 5년간 피해 다녔던 사람과 마주 앉아 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전화받고 놀랐어요. 절대 없을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나도 웃으며 답했다. “저도 제가 그 전화를 할 줄 몰랐어요.” 우린 서로 고맙다는 말을 셀 수 없을 만큼 뱉었다. 이후 그는 A장비가 필요하면 나를, 나는 B재료가 급하면 그를 찾았다.


우리의 관계는 ‘빼앗기’에서 ‘도움 주기’로 재정립됐다. 이제는 팀장과 과장으로 직급이 올라 더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서로의 인맥은 난처한 순간마다 대안이 됐다. 그리곤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다.


투명한 협업을 위한 3가지 원칙

1. 고객 동의와 동석 커뮤니케이션: 가격/조건 협의는 고객 앞(메시지 공유)에서만.

2. 가격 담합 금지: 각 사는 독립적으로 최종 제안을 제시하고, 서로의 내부 가격정책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레퍼럴은 가능하되, 비공개 할인 강요는 금지.

3. 기록 남기기: CRM·견적 메일에 협업 경위와 고객 동의를 간단히 기록.


‘임시 동맹’을 맺는 기준 3가지

1. 적합성: 우리 대체재가 고객 요구를 명백히 충족하지 못할 때.

2. 고객 최우선: 장기 신뢰가 단기 매출보다 클 때.

3. 상호보완: 상대가 우리가 약한 영역을 메우고, 우리는 상대의 빈칸을 채울 수 있을 때.


효과는 단순했다. 반년을 지나 보니 교차 레퍼럴 8건, 신규 매출 6억 원. 단기 승부 대신 신뢰의 저수지를 키운 셈이다.


가끔은 ’ 그때 내가 그를 배척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랬다면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선택지 중 상당수가 사라질 거다. 당장은 좋을 수 있어도 롱런은 힘들 거라 예측한다. 어쩌면, 지금의 내 모습은 ‘경쟁자를 통한 성장’에 영업당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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