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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융 Nov 30. 2017

다름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

내가 이탈리아에 있는 다국적 극단에서 작업을 하며 배웠던 것은 연기에 대한 테크닉도, 공연 전반에 대한 지식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이 분명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내 플랏메이트들은 브라질에서 온 길례르메와 그라지엘레, 대만에서 온 샤오였다. 공연을 하러 다른 나라에 가면, 나는 캐나다에서 온 타라와 프랑스에서 온 제시카와 같은 방을 썼다. 그 밖에도 내 연인인 프랑스인 베누아가 있었고, 작업 파트너인 프랑스인 앙토낭, 프랑스인 델핀, 벨기에인 세실, 미국인 감독 토마스가 있었다. 같은 극단에는 또 아르헨티나에서 온 알레한드로도 있었고, 이탈리아인 펠리치타와 마리오 비아지니, 프랑스인 호반, 브라질인 수엘란, 미국인 로이드가 있었다. 그 중에는 백인도, 흑인도, 황인도 있었다. 50대가 있었고, 40대가, 30대가, 20대가, 10대 후반이 있었다.


집에서 성을 소유하고 있는 귀족 집안의 자손도 있었고, 나같이 정 반대인 사람도 있었다. 동성애자인 사람도 있었으며, 자신이 부모와 같은 정신병을 이어받지 않을까 평생을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은 자연에 몸을 의탁해 생을 마감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고, 부를 쥐는 성공을 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블루 치즈를 '냄새나는 것'쯤으로 치부했지만, 일 년 뒤에는 블루치즈와 함께 와인을 즐기게 되었으며, 델핀은 나와 함께 약과를 만들었다. 우리는 파티에서 삼바춤을 췄으며, 나는 사람들을 불러 한달에 한번씩 김치를 담궜고, 호반은 매일 아침마다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먹고 하루를 시작하게 됬다. 


 길례르메는 독일인 브라질인의 혼혈로써, 자신의 것, 이라는 선이 확실히 있는 사람이었다. 밥을 먹고 그의 것까지 설거지를 하려해도 그는 안된다고 막았으며, 같이 음식을 해 먹자고 해도 거부했다. 철저히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 이건 안돼, 저건 안돼, 라는 확실한 기준이 있었으며, 절대 약한 면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끼리 저녁에 와인을 마시며 나누는 하하호호 대화에도 그는 참여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길례르메와 함께 지내면서 그런 삶의 자세가 얼마나 그 자신을 제한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안타까웠다. 나는 매일 저녁 길례르메보다 극단에서 집으로 30분 정도 일찍 돌아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매일 저녁, 그와 샤오를 위해 저녁을 만들었다. 가끔은 샤오가 저녁을 만들었다. 그가 바빠보이는 날은 언질을 주지 않고 먼저 그의 설거지를 대신했으며, 그가 청소를 하기로 되어 있는 날은 그와 함께 청소를 해주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의 가면이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는 서서히 우리 앞에서 바보같은 웃음을 내보였고, 눈물을 보였고, 저녁마다 콘 케이크, 초콜렛 케이크, 당근 케이크같은 것들을 만들어 주었고, 주말에는 같이 소풍을 나갔다. 


그는 어릴 적 시한부 판정을 받았었다. 나중에 그가 털어놓은 사실이다. 의사는 그에게 곧 죽을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좀처럼 죽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그는 빚지는 것 같은 삶을 살았다. 지금이라도 '곧' 죽을거라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감정을 내보이기도, 마음을 열어 교류하는 것도 힘들었다. 뭔가 얻으면 결국 곧 포기해야하는 삶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모두의 내면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도 아닌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얽히고 섥혀 있고, 지금의 그 사람을 만들어내고 있다. 누군가를 보았을 때, 그 사람이 나와 맞지 않을 때, 우리는 무시할 수도,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그 사람의 다름을 단지 사랑의 눈으로 바라봐 줄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사랑의 눈을 알아 차리고 자신의 가슴에 굳게 닫힌 창을 열어 보인다. 그때, 우리는 마음과 마음으로 만난다. 그 사람의 버릇이나 태도가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해한다. 인간을 이루고 있는 많은 부분이 그 인간의 아픔과 고통으로부터 발현된 것이라는 걸.


나는 대항하는 대신 사랑하는 것이 상대에게 궁극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타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을 마음으로 만나는 순간, 그 사람의 삶이 내 삶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나는 지금 길례르메와 같이 살고 있지 않지만, 같이 일하고 있지도 않지만, 내 일상의 어떤 행동들 안에서 그의 존재를 느낀다. 그 뿐만 아니라 내가 마음으로 만나왔던 수많은 존재들이 나의 삶을 이루고 있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럴 때면 미소가 지어진다. 지금처럼 눈물이 지어질 때도 있다. 


인간의 존재를 만난 사람은, 인간의 따스함을 오롯이 자신으로써 체험한 사람은, 인간이 가진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가슴 한켠에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도록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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