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밖 세상 유럽 편 #017
♫ L'Amour, Les Bagette, Paris - Stella Jang
'르 아모~흐, 르 바겥~뜨, 빠히~...'를 흥얼거리며 도착한 곳은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너무나도 아름다운 도시, '릴Lille'이었다. 아직 파리(빠히)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프랑스에 입성했다는 것만으로도 들떴다. 왜냐하면 내게 프랑스어는 너무나도 섹시하고 매력적으로 들리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인 친구를 사귀어 떠듬떠듬 일지라도 프랑스어를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에 한껏 들떠있던 나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전, 폴란드 가토비체Gatowice에 머물던 때였다. 보드게임을 하며 친해진 두 명의 호스텔 룸메이트 중 한 친구가 릴 출신이었다. 여행할 프랑스 도시를 물으니 본인의 고향인 릴을 적극 추천해 줬다. 매주 수요일마다 열리는 전통시장에는 꼭 가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여담으로, 필자의 배낭여행을 꿈꾸게 만들어준 TV 프로그램 '비정상회담'의 프랑스 대표 '오헬리엉'은 릴 출신이다!
릴을 향한 모험에는 우여곡절이 하나 있었다. 암스테르담에서 릴에 가기 위해서는 벨기에 수도 브뤼셀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가, 버스로 환승을 해야 했다. 브뤼셀역에 내려 버스정류장을 잘 찾았건만, 버스 출발 시간 5분을 남기고 핸드폰으로 버스를 예매하려고 보니 너무 늦었다는 이유로 예매를 막아놓은 게 아닌가(!). 그래도 3분 이상 남았으니 직접 표를 구매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곧장 버스기사에게 물었다.
"Can I buy the ticket?"
그 찰나의 정적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상당한 거구의 버스기사는 나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며 한 번 더 물으니 이번에는 손사래를 치는 것이 아닌가. '이게 말로만 듣던 인종차별인가? 나 지금 뭔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거야?'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그 순간 파비앙*이 항상 하는 말이 떠올랐다.
*파비앙은 프랑스 파리 출신의 방송인으로, 이화여자대학교에 교환학생 온 것을 계기로 한국의 매력에 빠져 한국에 거주, 활발하게 프랑스 문화를 한국인 시청자에게 홍보하고 있다.
"시청자 여러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프랑스인)는 영어를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해요!"
- 출처: 별다리 유니버스 (링크, 3:49)
혹시나 해서 다른 탑승객에게 'Do you speak English?'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탑승객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프랑스인)은 도와줄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영어를 그냥 못해서) 도와줄 수 없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버스에서 내려 다음 시간대의 표를 예매했다.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유튜브로 속성 프랑스어 강의를 받았다. 자고로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 기본적인 프랑스어 문장을 반복적으로 따라 말하며 악명 높은 'r' 발음하는 법을 익혔다. 그때 배우고 가장 유용하게 써먹은 것이 바로 '엉 뜨헤디숑 실 부쁠레?'이다.
"Bon jour, une tradition s'il vous plaît? Merci beaucoup!"
: 안녕하세요, 전통 (바게뜨) 하나 주시겠어요? 감사합니다!
아무리 파리라 할지라도 직원이 영어를 반드시 할 것이라는 예측은 금물! 서울 사는 알바생이라고 해서 모두 영어를 유창하게 듣고 말할 줄 아는 건 아닌 것처럼, 프랑스에 왔으니 프랑스어를 배워서 쓰려는 노력을 통해 그들 문화에 대한 존중을 표했다.
운이 좋게도 릴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이 전통시장을 여는 날이었다. 소소하게 둘러본 릴의 모든 거리는 하나같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전통시장에서 나는 사람 사는 냄새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꼭 바게뜨와 치즈를 사서 먹어봐야지!'라는 목표와 함께 비장한 마음으로 전통시장에 들어섰다.
다양한 채소와 과일은 물론이고 옷가지나 장난감, 장신구도 팔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통시장을 이방인의 입장에서 둘러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에겐 따분한 내 고향 오일장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전통의 가치를 대변하고 있었겠거니, 하고 반성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치즈 가판대였다. 만화나 영화로만 보던 유럽의 그 치즈가 한가득 나열되어 있는 모습을 보니 장관이 따로 없었다. 그들에게는 당연한 생필품인 치즈가 나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희귀한 특산품이자 생경한 음식이었다.
과연 그 맛은 어떨까? 제대로 된 치즈를 먹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기대 반 긴장 반이었다. 프랑스인 친구가 알려준 대로 나이프로 조금씩 싹둑 잘라 바게뜨에 발라먹었다.
빵과 치즈는 알코올을 부르는 천상의 조합이었다. 맘 같아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곁들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같이 마실 친구가 없었다. 고독으로부터 도망치듯 여행을 떠나왔건만... 어느샌가 고독에 신음하고 있었다.
술친구가 그리워지는 어느 아름다운 도시의 밤이 지나고, 파리로 가는 아침해가 밝아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꼽으라면 항상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바로 그 도시에 간다. 아름다운 건축물로 말하자면 개선문, 에펠탑, 베르사유 궁전이 파리를 대표한다. 건축물에 얽힌 역사적인 사건도 파리의 매력에 빠져들기에 탁월한 촉매가 되어준다.
파리를 둘러볼 생각에 들뜬 것도 잠시, 난데없는 우울감과 고독함이 나를 덮쳤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에 가는데, 정작 나는 외면은 물론이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는 나그네와 같았다. 어쩌면 파리의 밤을 이야기 꽃 피우며 함께 보낼 친구를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호스텔에 들어서자마자 찾아온 우연한 만남은 그 고독을 잠시나마 진통시켜 주었다. 자기 몸만 한 여행가방을 끙끙대며 계단을 오르는 한 동양인 여성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한국인임을 알게 된 우리는 알고 보니 우리는 같은 방을 배정받았고 그 역시 나처럼 혼자 유럽을 여행하고 있었다. 그동안의 여행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우리는 서로의 여행을 응원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던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은 마음에 그의 계획을 물었다. 낮에는 에펠탑이 보이는 정원에서 혼자 와인을 마시고 저녁에는 한국인 여행객들과 함께 개선문을 오른다고 했다. 네이버 카페 '유랑'을 통해 만난 여행객들인데, 얼떨결에 나도 동참하게 되었다.
개선문에 올라 바라본 야경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홍익대 건축학과 어느 교수님의 책을 읽은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저자가 말하길, 시선의 높이는 암묵적인 권력을 상징하고, 건축물의 높이는 그 도시의 자존심을 대변한다.
웅대하고 거룩한 개선문과 에펠탑은 세계를 고객으로 하여 사람들을 하나의 장소에 불러 모으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높이에서 오는 권력을 모든 시민에게 허용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그 권력이 가지는 의미를 체감하고 무의식적으로 갈망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필자도 그중 하나였다. 권력이 무엇인지 설명은 할 수 없어도 느낄 수는 있었다. 그러나 권력을 갈망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어쩌면 배낭여행에서 얻은 소중한 인생숙제일지도 모르겠다.
우물 밖 세상 유럽 편 #017 - 마침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가명이며 이야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각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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