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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하면 떠오르는 것?

우물 밖 세상 유럽 편 #016

by 권민재
"암스테르담? 대마 피우러 가게?"



언젠가 호스텔에서 만난 한 남자가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거기 유명한 홍등가 있잖아, 'Red Light District.' 거기 예뻐, 한 번 가봐."



암스테르담을 대표하는 게 대마와 홍등가라니, 내 여행에 불법행위를 채워 넣기는 싫었다. 아름답고 신비한 암스테르담을 불법적인 도시로 기억하고 싶진 않았다. (물론 대마흡연은 네덜란드에서 합법이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인 신분이다.)



암스테르담을 불법적인 도시로 생각해서 긴장한 탓일까? 목적지로 향하는 도중에 얼토당토않은 실수를 저질렀다. 쾰른에서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버스에 배낭을 싣고 허둥지둥 탑승했다. 버스가 국경을 넘을 즈음, 아뿔싸, 충전기를 두고 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붉은색으로 변한 핸드폰 배터리 잔여량은 상황의 심각성을 환기시켰다.



어쩔 수 없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근처 대리점에서 충전기를 구했다. 지출하지 않았어도 되는 비용이라고 생각하니 후회가 막심했다. 한편으로는 오늘날 핸드폰의 유무가 배낭여행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핸드폰을 사용하지 못할 때의 혼란과 불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대리점 직원에게 건넸던 말이 기억난다. “You saved my life.”






막간의 상식 퀴즈! 조선시대에는 네덜란드를 뭐라고 불렀을까?



네덜란드의 음차어는 ‘화란和蘭’이라고 한다! 문득 궁금해졌다. 어떻게 읽으면 네-덜-란-드, 가 화-란, 이 되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은 장소는 암스테르담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네덜란드의 행정 도시 ‘덴 하흐 Den Haag’라는 이름의 도시였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기억하는지? 이준, 이위종, 이상설 열사가 '헤이그'란 이름의 한 네덜란드 도시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특별한 임무를 가지고 파견된 역사적 사건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행정권한을 잃은 상태였기에 이들 열사는 초대는 물론 경비조차 받지 못했다. 이들의 임무는 '을사늑약'이 평화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체결되었음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린 무대가 바로 ‘덴 하흐’이다. 네덜란드는 g를 ㅎ로 발음하더라. 헤이그가 하흐였다는 것도 놀라운데, 더 신기한 것은 중세 유럽 때까지 네덜란드는 ‘홀란트Holland’라는 이름의 국가였다는 점이다. 네덜란드는 d를 ㅌ로 발음하는 듯. 홀-란-트, 가 화-란, 이 된 것은 그럴싸해 보였다. 궁금증 해결!



헤이그는 암스테르담보다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비교적 한적한 도시 외곽, 어느 골목길에 위치한 작은 기념관에서 그들 열사의 역사를 읽으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기념관의 이름은 '이준 열사 기념관'으로, 'YI JUN PAECE MUSEUM'이 쓰여있었다.



IMG_4764.JPG 헤이그에 위치한 이준 열사 기념관. 2층에는 YI JUN PEACE MUSEUM 이 적혀있다.



이준 열사 기념관에 소개된 세 열사의 일대기는 꿈 많은 한국 소년으로부터 커다란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모든 사료를 꼼꼼히 탐독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한 그들은 (당연하게도)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을사늑약의 실체를 세상에 알려야 했다. 외국어에 능통했던 이위종 열사는 길거리에서라도 대한제국의 한을 알리고자 했다. 그의 나이 만 18세였다.



남루한 차림의 아시아 청년이 유창한 외국어로 한을 토해내고 있는 모습에 감명을 받은 것일까. 당시 그의 열성적인 토로는 네덜란드어로 기사화되었다. 기념관을 운영하는 한인 노부부께서는 직접 기사를 번역해 전시해 놓았다. 한 사람의 한국인 청년의 입장에서 읽고 있자니 가슴이 끓어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IMG_4784.JPEG 이위종 열사와 기자의 대화가 실린 기사 번역본 일부. 기념관을 운영하시는 노부부께서 번역에 수고해 주셨다.



다음은 위 기사의 인용이다.



"아!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1905년 조약 (을사늑약)이란 조약이 아니군요. 그것은 우리 황제폐하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대한제국 외무대신과 체결한 하나의 협약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서명된 서류는 결코 비준된 적이 없습니다. 결국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 효력도 없는 것입니다. 대한제국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 조약은 무효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불법적이며 아무런 가치도 없는 서류로 인해 대한제국이 이번 회의에서 제외되었단 말입니다!"
- 이위종 열사



기자는 기사 서두에 이위종 열사를 '학식이 깊고 수개국어에 능통하며 철저하고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충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느낀 이위종 열사의 모습은 가히 그런 평가를 받아 마땅했다. 그가 헤이그에서 열띤 토로를 하던 때로부터 120년이 지난 지금,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 출신의 만 21세 소년이 열사를 찾아왔다. 열사는 더 이상 한 사람의 억울한 이방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수많은 청년들의 롤모델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한창 방황하는 시기에 이위종 열사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굳게 믿고 현실을 바꾸기 위해 직접 나서는 것. 현실의 벽에 부딪혀도 포기하지 않고 또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것. 내가 이위종 열사에게서 배운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이 지났을 때에도 누군가는 나를 보며 가슴 뛰는 경험을 할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다.



우물 밖 세상 유럽 편 #016 -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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