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멜 남자, 화이트 초콜릿 여자 003
2년 만에 다시 만난, 친구에서 여자친구가 된 그녀를 만나 스웨덴 기숙사에서 첫 일주일을 보낼 때의 이야기.
대략적인 유럽배낭여행 일정을 짰고, 각지의 친구들에게 연락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베를린에서 교환학생 하고 있는 내 대학 친구나,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있는 군대 동기도 있었다. 2년 전에 유럽을 돌며 사귄 친구들에게도 연락했다. 덕분에 독일-폴란드-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이탈리아-프랑스-영국 순의 여행 계획이 순조롭게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기숙사 방 정리를 마치고 짐을 부치려고 택배 회사를 들여다보던 여자친구 눈가에 불안의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의 본가 폴란드로 택배를 부쳐야 하는데, 그 유일한 수단이었던 택배회사 홈페이지를 보니 우리가 원하는 날짜는 이미 마감이었다. 내일모레 아침 택배를 부치려고 했는데, 너무 밭은 날짜인 탓이었다. 다음 주까지 어쩔 수 없이 기숙사에 머물러야 한다는 죄책감에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당장 내일모레 여행을 떠나기로 되어있는데, 부쳐야 할 택배에 발목이 붙잡혀 여행계획을 망쳐버렸다는 생각에 그녀는 쉽사리 울먹임을 그치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다독였다. 망친 게 아니라고, 방법이 있을 거라고, 그러니 자괴감에 빠지지 말라며 있는 힘껏 꼬옥 안아주었다. 그 순간에 주고받은 포옹의 압력과 떨림, 흐느낌은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내 여자를 안정시키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남자로서의 책임감이었다.
여자친구를 진정시킨 뒤 냉정하게 해결방안을 생각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 허락된 짧은 시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하루라도 더 배낭여행을 즐기며 다양한 것을 보고 느끼고 싶었다. 같은 곳에 일주일을 더 머무를 수는 없었다.
홈페이지에 적힌 이메일주소로 상황을 설명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기한이 지난 것은 알지만, 사정을 봐줄 순 없겠느냐고 말이다. 여자친구는 반신반의했지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폴란드어로 메일을 보냈다(폴란드 국적의 기업이었다. 어쩌면 봐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녀를 안정시키고 최선의 해결책도 실행에 옮겨놓았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답장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메일이었지만,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그 기다림에 일희일비하며 허송세월 하긴 싫었다. 나는 말했다.
“여기에 더 머물러도 좋아. 나는 배낭여행을 하고 싶어서 이 먼 곳까지 온 게 아니야. 난 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온 거야. 중요한 건 너지, 여행계획이 아니야. 그러니 우리의 여행을 망쳤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따끈한 토스트에 가염버터를 바른 간식을 먹으며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돌아갔다. 메일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터였다. 그동안의 추억을 영상으로 만들 수도 있고, 근처 도시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었다. 우리가 마냥 행복한 이유는 여행 중이라서가 아니라 함께이기 때문임을, 우리는 알아가고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던 아침비는 스웨덴의 작고 아름다운 도시 Lund에 우리가 도착할 때쯤 그치며 예쁜 무지개를 만들었다. 당일치기 여행 중 만난 무지개가 청신호라도 된 듯, 머지않아 우리는 택배회사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예정대로 내일모레 아침에 택배를 부치고 배낭여행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두 다 내 덕분이라고, 나를 치켜세우는 그녀에게 다시금 되새겨주었다.
너와 함께여서 행복해.
카라멜 남자, 화이트 초콜릿 여자 003 - 마침
이야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각색되었습니다.
원저작물의 저작권은 브런치스토리 작가 권민재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