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멜 남자, 화이트 초콜릿 여자 004
어느 날 케이팝 아이돌을 좋아하는 이탈리아 친구가 물었다.
"낭만이 영어로 뭐야?"
아마도 romantic을 말하는가 싶어서,
"이탈리아 로마 사람들이 로맨틱하잖아! 그래서 romantic이라고 해."
"그럼 남자들끼리 우정 여행 가거나 언덕에 올라 혼자 석양을 바라보는 것도 romantic이라고 해?"
'응? 그건 낭만적인 건 맞지만 romantic은 아닌데...' 그 순간 적절한 번역어를 찾을 수 없었다. 낭만적이라는 단어를 적절하게 번역할 영어 단어는 없었다.
하루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군대 동기를 만난 때였다. 나와 내 여자친구는 배낭여행을 하는 그와 동행하기로 했다. 타지에서 다시 만난 우리의 상황이 참으로 낭만적이라는 데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우리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그녀는 '낭만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한국어를 잘 모르는 그녀에게 이 복합적인 말을 표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romantic은 적절한 단어가 아님에 그는 동의했다.
그가 물었다.
“여행하면서 가장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언제야?”
“노을 지는 바다 앞에서 돗자리 깔고 직접 만든 볶음밥을 서로 떠먹여 줬을 때.”
”피렌체에 머물 때, 하루는 피자 두 판 포장해 와서 한나절동안 방 밖으로 안 나갔어. '진짜' 이탈리아 피자 먹고 노트북으로 영화 보며 뒹굴거리고 …”
”노을 지는 피렌체 미켈란젤로 광장에 사람이 정말 많이 모여있었어. 그 노을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하는 그녀를 목마 태웠지. 솔직히 비틀거리지 않고 잘 버틸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쉽게 해냈어. 가볍더라고. 카메라에 담긴 결과물은 정말 멋지고 낭만적이더라.”
"옅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초저녁 니스는 정말 나이스했어. 서로를 배려하듯 멀찍이 떨어진 버스커들은 각기 개성을 뽐내고 있었지. 우리는 하늘색 커플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거닐었어. 돌담에 앉아서 수다를 떨거나 버스커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연주를 숨죽이고 감상했지. 그 모습을 카메라로 담아두었는데, 수개월이 지나서 다시 보니 벅차오르더라고, 웃기기도 하고. 여자친구가 내 다리를 계속 흔들며 가만 놔두지를 않는 거야. 정말 touchy한 모습이 귀여웠어.”
모든 순간이 낭만적이었지만, romantic이란 단어만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었다. 낭만적인 이야기를 써내려 가는 것은 더 이상 로마인 다운 행동이 아니라 우리 다운 행동이었다.
하루는 지방법원에 사촌과 함께 견학을 갔다. 경매에 관심이 생겨 경매 시찰 참관을 갔다가 시간이 남아 옆에 있는 법원에 무작정 들어간 것. 경비원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로 왔어요?"
"견학을 하려고 하는데요..."
아저씨는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들어와 둘러보라고 했다. 이리저리 구경하던 중에 질문이 생겨 물어보려던 찰나 아저씨가 먼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진짜 견학을 하고 싶으면 여기 말고 서울중앙법원을 가봐요. 나도 거기서 왔는데 거기가 진짜 크고 사람도 많이 다니니까 배울 수 있는 것도 많을 거야."
열띠게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모습에 감동하던 것도 잠시, 나의 집중력을 환기시키는 주제가 나왔다.
"여자친구랑 결혼해서 살면 평생 행복할 것 같지? 그것도 딱 1년 간이야. 착각하면 안 돼요."
어찌도 이렇게 내 주변 어른들이 하는 말은 한결같이 똑같을까? 거기에 놀란 것도 잠시, 나는 열의에 찬 아저씨의 일장연설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찌도 이런 열성적인 대담을 우리에게 해주시는 걸까?
그때, <비포선라이즈(1995)>의 한 장면이 불현듯 떠올랐다. 조쉬가 셀린에게 기차에서 내려 본인과 함께 도시를 둘러볼 것을 권유하는 장면이었다.
"시간여행이라고 생각해 봐요. 미래의 당신은 지루한 남편과 만나 아이를 돌보는 따분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거죠. 그러다 갑자기 20년 전 그때 기차에서 만난 그 남자를 따라 내렸으면 어땠을까, 생각에 잠긴 거에요. 지금이 바로 그 시간여행인 거죠."
너무나도 낭만적이고 환상적으로 들리는 이 이야기는 <비포선라이즈>의 정수와도 같다. 나의 인생 영화이자, 오늘의 그녀와 나를 만든 고마운 영화이다.
아저씨는 과거의 자신을 투영시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시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어른이 해주는 조언을 우리는 귀담아듣고 있었다.
시간여행이라고 생각해 보자. 지금 이 순간을 한시도 허투루 보낼 여유가 없다. 나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 존재하며, 이 세상에서 나는 잉여인간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졌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현재를 죽일 듯이 악착같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부조리한 이 삶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길이며, 그 길이야말로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과정이다.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목표한 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좌절을 조금만 하고 빠르게 다시 일어나 하루하루를 멋지게 버텨내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잘 버텨내자.
카라멜 남자, 화이트 초콜릿 여자 004 -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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