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지구의 기억

세밀한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저장고

by 김민재

오래전 해안 절벽 위를 지나 관측지로 가던 밤이 있었습니다.




어두운 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어디선가 파도 소리가 들려왔고, 머리 위로는 별이 쏟아졌습니다. 그 순간 묘하게도 별들의 빛이 내려오는 것과 파도가 밀려오는 것, 이 두 가지가 같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둘 다 거대한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느낌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 바다를 이루는 물이 저 하늘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Screenshot 2026-03-17 at 00.29.07.png 지구 표면의 71퍼센트가 바다입니다. © Getty Images

지구 표면의 71퍼센트가 바다입니다. 그 물이 어디서 왔는지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탄소질 콘드라이트 소행성과 혜성이 수십억 년에 걸쳐 실어온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런데 그 물이 지구에 도착한 이후 46억 년 동안 바다는 단순히 물을 담아두는 그릇이 아니라, 지구 전체 시스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바다는 지구의 온도 조절 장치입니다. 물은 열을 흡수하고 저장하는 능력이 매우 큽니다. 이것을 비열이 크다고 표현합니다. 같은 양의 열을 가해도 물의 온도는 암석이나 토양보다 훨씬 덜 오릅니다. 바다는 여름에 태양에너지를 흡수해 저장하고, 겨울에 서서히 방출하면서 지구 전체의 기온을 완충합니다.

Screenshot 2026-03-17 at 00.28.35.png 영국이나 일본처럼 섬나라들은 같은 위도의 내륙 국가들보다 기온 변화가 완만합니다. © Getty Images

같은 위도의 내륙 지방과 해안 지방의 기온 차이가 큰 것이 이 때문이고, 영국이나 일본처럼 섬나라들이 같은 위도의 내륙 국가들보다 기온 변화가 완만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바다가 없었다면 지구의 기온 변화는 지금보다 훨씬 극단적이었을 것이고, 그런 환경에서 복잡한 생명체가 수억 년에 걸쳐 진화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Screenshot 2026-03-17 at 00.28.45.png 지구의 바다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가 비교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 Getty Images

금성과 화성을 비교하면 이것이 더 실감납니다. 금성은 한때 바다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폭주 온실효과로 모두 증발했고, 화성은 자기장을 잃으면서 대기가 벗겨져 물이 사라졌습니다. 두 행성 모두 바다를 잃은 후 생명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 되었습니다. 지구의 바다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가 비교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바다는 탄소도 저장합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바닷물에 녹아 들어가고, 해양 생물들이 그것으로 석회질 껍데기를 만들고, 그 껍데기가 죽어서 해저에 퇴적됩니다. 이 과정이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조절하는 중요한 메커니즘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배출한 이산화탄소의 약 4분의 1을 바다가 흡수했다는 추정이 있습니다. 다만 그 결과로 바닷물의 산성도가 높아지는 해양 산성화가 진행되고 있고, 이것이 껍데기를 만드는 산호나 조개류 같은 해양 생물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바다가 탄소를 흡수하며 지구를 지켜온 동시에,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의 화학 조성도 흥미롭습니다. 바닷물에는 나트륨, 염소, 마그네슘, 칼슘, 칼륨 등 다양한 이온들이 녹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혈액의 이온 조성이 바닷물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농도는 다르지만 비슷한 종류의 이온들이 비슷한 비율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명이 바다에서 시작되었고, 우리 몸 안의 액체 환경이 그 초기 바다의 흔적을 담고 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맞는 생리식염수가 0.9퍼센트 농도의 소금물인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 세포가 원래 살던 환경과 가장 가깝기 때문입니다. 수억 년 전 바다 안에서 시작된 화학이 지금 우리 몸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바다는 기억을 품고 있습니다. 해저 퇴적층을 시추해 뽑아 올린 기둥 안에는 수백만 년에 걸친 지구 환경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과거의 기온, 이산화탄소 농도, 화산 활동의 흔적, 생물 종의 변화가 층층이 쌓여 있습니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그 층들을 읽으면 지구가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주적 시간의 스케일에서 지구가 걸어온 길을 이야기했는데, 바다는 그 길의 세밀한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저장고입니다.

Screenshot 2026-03-17 at 00.28.53.png 과거를 가장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지구 표면의 71퍼센트를 덮고 있는 저 바다입니다. © Getty Images

과거를 아는 것이 미래를 이해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과학뿐만 아니라 삶 전반에서 통하는 이야기이고, 그 과거를 가장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 지구 표면 71퍼센트를 덮고 있는 저 바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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